도시 대구의 기억법 대구 아키텍처 (2) | 황두진

건축가이자 건축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저술가인 황두진 소장이 대구의 노란 도시 철도에 몸을 싣고 네 편의 글을 전합니다. 지형적 유산과 이름의 연원, 근대건축, 오늘의 모습을 만든 시스템까지··· 정온하고도 합리적인 이 도시를 두루 돌아볼 요량입니다.

도시 대구의 기억법 대구 아키텍처 (2) | 황두진

도시 대구의 기억법 대구 아키텍처 (2) | 황두진

건축가이자 건축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저술가인 황두진 소장이 대구의 노란 도시 철도에 몸을 싣고 네 편의 글을 전합니다. 지형적 유산과 이름의 연원, 근대건축, 오늘의 모습을 만든 시스템까지··· 정온하고도 합리적인 이 도시를 두루 돌아볼 요량입니다.

“아예 현장이 그대로 있어요”

1호선 중앙로역에 도착한 것은 해가 진 후였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혹시 위령비 같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위령비요? 아예 현장이 그대로 있어요.” 역 구내에 들어서자 “여기는 기억 공간입니다”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이럴 수가, 20년 전 바로 그날이다. 온통 그을린 벽, 녹아내린 공중전화 부스, 그리고 희생자의 이름들. 검댕이 내려앉은 벽에는 시민들이 남긴 글씨가 가득하다. 가족과 연인, 친구를 부르는 안타까운 사연과 더불어 당시 시장의 책임을 묻는 분노의 절규도 보인다. 편집을 거치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2003년 2월 18일 화요일 아침 9시 52분, 출근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였다. 1호선 1079 열차가 반월당역을 떠나 중앙로역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뇌졸중과 우울증을 비관하던 한 중년 남자가 미리 준비해온 플라스틱 통의 휘발유에 불을 붙였다. 승객들이 제지하자 이를 뿌리치려는 과정에서 불이 처음에는 남자의 몸에, 다음에는 전동차에 옮겨붙었다. 전동차의 내부에 가연성 재료를 많이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순식간에 퍼진 연기와 유독가스로 인해 승객 49명이 결국 사망에 이른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9시 55분, 연기 자욱한 중앙로역의 반대 선로에서 1080호 열차가 진입했다. 사태를 파악한 기관사가 출입문을 닫았으나 전기가 끊어져 전동차가 움직일 수 없었다. 기관사는 승객들에게 전동차 안에서 대기하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곧이어 1079호 열차의 불이 1080호 열차로 옮겨붙었다. 종합사령실의 지시로 기관사가 마스터키를 뽑으면서 출입문이 다시 닫혔고, 타오르는 불과 연기 속에 수많은 승객이 갇혀버렸다. 최종적으로 집계된 사망자는 192명, 실종자는 6명 그리고 부상자가 151명이었다. 이것이 대구 역사상 최대의 트라우마, 바로 ‘대구 지하철 참사’다. 

적절한 추상성으로 고통의 기억을 덮고

일상의 삶에 지나친 충격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 추모 방식이 아닌가.

그러나 대구는 달랐다.

대구의 기억법

대구는 이 고통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나도 그랬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위령비 정도가 중앙로역 근처에 있으려나 짐작할 것이다. 적절한 추상성으로 고통의 기억을 덮고 일상의 삶에 지나친 충격을 주지 않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 추모 방식이 아닌가. 그러나 대구는 달랐다. 현장, 그리고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추모 공간이 되었다. 다른 도시 같으면 ”시민의 일상을 불편하게 만든다”라는 반대 의견에 밀려 구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대구도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지금과 같은 추모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만큼 대구 시민들이 아픔을 공감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마치 한 가족처럼.

대구 지하철 참사는 ‘지하철’이라는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계기였다고 전한다. 2005년 서울특별시지하철공사는 ‘서울메트로’가 되었고, 2008년 대구광역시지하철공사는 ‘대구도시철도공사’가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아직도 지하철이라는 표시가 많이 남아 있고, 도시 철도는 오히려 낯설다. 반면 대구에서는 도시 철도라는 이름이 매우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동대구역에 도착했을 때부터 받은 인상이다. 지하철과 도시 철도. 현장의 물성은 보존해도 언어의 물성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일까. 이 역시 대구가 기억하는 방식일 것이다.

삼국시대 고분군부터 구석구석 맛집까지
도시의 골목에 깃든 기억

불행한 사건만 기억의 대상일 리 없다. 대구는 기억할 것이 많다. 삼한 시대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고대사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동구 불로동에는 주거지 바로 옆에 거대한 삼국시대 고분군이 남아 있기도 하다. 중앙로역에서 지척인 대구근대역사관은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억할 것이 너무 많아 주체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즐거운 푸념과 같은 분위기를 은근히 풍긴다. 화목한 한 집안의 사진첩을 열어보는 느낌이다. 일행과 함께 대구 부영버스 체험 코너를 아이처럼 신나게 즐겼다. 공원만 해도 경상감영공원, 달성공원,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있는가 하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2·28민주운동을 기리는 공원도 있다. 이름만 보더라도 조선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사적·정치적 스펙트럼을 아우른다. 

한국전쟁의 포화를 가까스로 피해간 덕분에 대구 구도심이 역사 도시의 기억을 상당 수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천만 다행이다. 결과적으로 한국 도시 곳곳에서 보이는 도시 구조의 충돌적 불연속성이 대구에서는 그나마 덜 보인다. 청라언덕에서 계산성당을 거쳐 약령시로, 나아가 번화가인 동성로로 이어지는 역사 탐방로는 대한민국 그 어떤 곳에 비해서도 경관으로서나, 서사로서나, 심지어 구석구석 자리 잡은 맛집의 유혹으로서나 가히 일급이라 할 만하다. 벤야민의 ‘도시 산책자’는 파리나 베를린 못지않게 대구에서도 즐겁게 걸을 것이다. 

지금의 이 순간은 흘러가는 찰나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의 흐름이 모인 매듭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적어도 부박하지 않다.

대구는 기억한다. 대구는 잊지 않는다. 지금의 이 순간은 흘러가는 찰나가 아니라 수많은 시간의 흐름이 모인 매듭이다. 그래서 이 도시는 적어도 부박하지 않다. 젊은이들의 도시이면서, 그 부모들의 도시고, 까마득한 선조들의 도시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대구는 도시의 중심이 가장 움직이지 않은 대표적 도시로 꼽힌다. 오랜 역사에 걸친 다양한, 심지어 극적인 변화의 경험 또한 그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전해지고 있다. 기억의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릴 것이 많은 대구, 그 과거만큼이나 미래가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Illustration | 대구 도시철도의 역사 출입구. 황두진 소장이 보내온 사진을 바탕으로 작화했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황두진

황두진은 건축가이자 건축을 매개로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저술가다. 서울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2000년 자신의 사무실을 시작했다. 서울 구도심에서 출발해 작품과 강의, 전시를 통해 한국과 해외로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서울시건축상, 건축역사학회작품상 등을 수상했고, 대표작으로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원앤원 63.5, 춘원당 한방병원 및 박물관,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한국관을 비롯해 일련의 한옥 작업 등이 있다. <무지개떡 건축>,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등 7권의 저서에서 그의 시야를 찬찬히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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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아키텍처 (2) | 황두진
  • EditMijin Yoo PhotographDoojin Hwang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