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뭉티기 하실라예? 노포 인 더 시티 (1) | 한석동

말이 태어나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이 나면 서울로 보내라 했던가. 필자가 태어난 경주에선 서울 아니면 대구로 올라갔다. 맘 잡고 달리면 한 시간 안에 당도하는 광역시(당시엔 직할시였다)라니, 촌사람 읍내 가듯, 종종 대구에 갔다. 예전부터 유흥이 발달했다는 흥 많은 도시 대구는 그 무더위만큼이나 화끈한 면이 있었다. 맛있게 매운 떡볶이부터 지금의 치맥 페스티벌을 있게 한 양념치킨들, 대구식 육개장까지··· 음식만 봐도 “파워풀 대구, 컬러풀 대구”를 연상시키는 강렬함이 있다. 유명 식당과 카페에서도 대구를 F&B 센터로 활용한다는 말은 허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서 요즘도 가끔, 대구에는 ‘먹으러’ 간다. 하루 세끼가, 부족한 내 위가 원망스러울 땐 차선책으로 밀려나는 요리도 있기 마련인데 뭉티기는 늘 아귀가 맞지 않아 아쉬웠다.

밥상머리 교육

“자고로 고기는 단디 익혀 무야 한다!” 밥상머리 교육은 참 무섭다. 어릴 때부터 소고기건 돼지고기건 바짝 익혀 먹어야 탈이 없다는 가르침을 받은 이래 생고기는 제아무리 육회라 해도 별로 달갑지 않았다. 생고기 먹고 탈 났다는 카더라 뉴스의 공포는 살짝 익혔을 때 맛볼 수 있는 육즙과 특유의 식감을 함께 앗아갔으니··· 고기는 씹어야 제맛이라지만 이리저리 뒤집다 풍미며 수분이 다 사라진 퍽퍽살만 먹어온 셈이다.
“미디엄 웰던이요”라고 주문하는 게 “바짝 익혀주세요”보다 멋있어 보이기 시작한 때부터, 조금씩 생고기의 맛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곱창집에서 조금씩 내오는 간과 천엽, 그리고 육회는 내게 어른의 맛과도 같았다. 소주가 달면 어른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처럼 양념의 잔재주 없이 재료 본연의 맛이 중요한 생고기를 먹으며 진짜 어른이 된 듯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그렇지만 빨갛다 못해 선홍빛에 가까운 생고기의 첫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심지어 이름도 뭉티기란다. 왠지 도전 욕구가 샘솟는 상대가 아닐 수 없다. 뭉티기는 뭉텅뭉텅 큼직하게 썰어낸 고기를 의미한다는 의미의 경상도 사투리로, 고기 자체의 풍미가 있어 생으로 먹어도 전혀 싱겁지가 않은데, 기호에 따라 참기름과 마늘, 고춧가루 등을 섞은 양념에 푹 찍어 먹는 게 특징이다.

하드코어의 서막, 왕거미식당

왕거미식당

1976년에 왕거미식당을 개업한 당시 별다른 조리법이랄 게 없었던 뭉티기와 오드레기의 양념을 직접 개발했다. 지금까지 그 맛을 잃지 않으며 대구 뭉티기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696-8

대구 특송이라며 가로수길에도 뭉티기 메뉴가 선보이기 시작할 때 즈음, 제일 먼저 접한 이름이 왕거미식당이다. “어쩜 여긴 이름도 왕거미야!” 뭔가 극적이고 강렬한 포스가 풍긴다. 접근성도 제법 좋다. 1976년 개업한 이래 2대에 걸쳐 운영 중이라는데, 당일 도축된 생고기만 판매한다고 한다. 부푼 가슴을 안고 달려갔다. 철이 없었죠… 맘만 먹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음식인 줄 알았던 내 불찰이다. 입구에 사람들이 웅성이는 모습을 봤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돌아오는 답은 “오늘은 소 잡는 날이 아입니더…” 이게 웬 날벼락인가. 뭉티기는 재료의 선도가 무엇보다 중요한 음식인 만큼 매일매일 소를 잡고 손질해야 내어놓을 수 있는데, 그 점을 간과했다. 하는 수 없이 오드레기로 아쉬움을 달래본다. 오도독오도독 씹는 소리가 특이해 오드레기라고 처음 명명한 곳이 바로 왕거미식당이라니, 주인 제대로 찾아온 셈이긴 하다. 뭉티기, 오드레기… 대구는 형용사를 명사화하는 재주가 있구나. 씹으면 씹을수록 구수함이 더해지는 오드레기에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다음을 기약해본다.

마스터피스, 장원식당

장원식당

왕거미식당과 함께 ‘대구 뭉티기 성지’라 불리는 장원식당. 고기가 남아 있더라도 상태가 좋지 않으면 판매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유명하니,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다.

 

대구시 중구 태평로 256-4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었다. 두 번째 시도는 장원식당이었다. 내 나름대로 조사도 하고 추천도 여러 곳 받았는데 왠지 여기가 끌렸달까. 5시부터 영업한다고 적혀 있었으나 늦장 부렸다가 생고기가 동난다는 후기를 접하고 ‘일찍 가서 기다리지 뭐’ 하고 4시 40분경 가게 앞에 당도했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우리가 왔노라며, “조금 기다릴게요”라며 인기척을 하려는데 가게 안에선 이미 한바탕 술판이 벌어지고 있다. 오랜 단골로 보이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뭉티기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 기어가는 목소리로 “뭉티기 포장 돼요?” 하고 묻는다. 주인분이 마뜩잖은 표정으로 고기를 살피는데, 이내 고개를 끄덕이자 가슴을 쓸어내렸다. 바른 말을 너무 해서 장사하는 데 손해 보는 일이 많다는 주인분은 고기 썰랴, 묻는 말에 답해주랴 쉴 새가 없다. 남들은 자랑 못 해 안달인 방송에 나와도 그 흔한 연예인 사인 한 장 붙이지 않은 뚝심이 남달라 보인다. 사람이 많아 네 접시를 썰어달랬더니 고기 상태가 썩 좋지 않다며 세 접시만 가져가라는데 왠지 믿음직스럽다. 내 보기엔 같은 고기처럼 보이는데 그 나름의 엄격한 기준이 있는 것 같다. 이내 수긍하고 뭉티기 세 접시에 육회 한 접시를 포장했다. 포장 그릇이 불룩하도록 담아주는 인심을 보니 무뚝뚝하지만 정이 많은 분인 듯. 한국인의 정이라지만, 맛없으면 가차 없다. 숙소에 돌아와 한 점 입에 넣어보니 고기 한 점을 써는 데 왜 그리 신중했는지 알 것 같다. 쫄깃하며 차진 식감이 입안에서 씹을수록 고소함이 배가된다.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해 계속 먹어도 부담 없다. 고기 썰기를 기다리며 귀동냥으로 오랜 단골이라는 손님들의 뭉티깃집 품평을 듣노라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뭉티기는 단연 여기라고 치켜세웠다. “거기는 영 파이고(’좋지 않고’라는 뜻의 대구 사투리), 거기는 좀 괘안코.. 여러 가지 무을라면 극동도 나쁘지 않고, 뭉티기는 여가 젤 낫지!” 썰고 남은 고기는 주변에 육개장 하라고 나눠주기도 해왔고, 고기가 별로면 육회로라도 팔지 않았단다. 그 꼬장꼬장한 자부심 하나로 여기까지 왔다!

밤에 피는, 장미

장미

1980년대 소주방을 떠오르게 하는 장미에서는 레트로한 분위기까지 함께 경험할 수 있다. 노포의 역사를 이어받아 젊은 층에게 사랑받고 있는 뭉티기 식당.

 

대구시 중구 경상감영길 209

@rose_soju

대구 일대를 돌아다녔더니 하나같이 입을 모아, 교동이 뜬단다. 도깨비시장이 있던, 미로 같던 교동이 왜 뜨느냐 물었더니… 주변에 오피스텔이 대거 들어서며 젊은이들이 많아져 자연스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이자카야부터 와인 바까지 다양한 개성을 지닌 가게들 사이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장미’다. 간판부터 내부 인테리어까지 1970~1980년대 우리네 아버지들이 갔을 법한 그 비주얼이다. 그러고 보니, 빨간 생고기를 접시 가득 동그랗게 담아내는 모습이 만개한 장미꽃 같기도 하다. 매일 도축한 최상급 한우를 준비한다는데, 제법 편하게 뭉티기와 오드레기를 즐기기에 손색이 없다. 이를테면 보급형 뭉티기랄까. 흘러간 유행가를 들으며, 촌스러워 키득키득 웃음이 나는 인테리어의 장미. MZ들은 레트로가 신기해서, 우리는 추억을 회상하려 장미를 찾는다. 옆 테이블에선 인절미보다 더 차진 뭉티기가 담긴 접시를 거꾸로 뒤집으며 릴스를 찍는 젊은이도 종종 보인다. 그들에게 뭉티기는 마냥 인스타그래머블한 안주겠지.

한석동

빈폴BEANPOLE, 구호KUHO, 에스티 로더ESTEE LAUDER 등 패션·뷰티 브랜드를 거쳐 감각 있는 안목을 장착한 마케터 한석동은 좋은 제품은 누구보다 기민하게 알아보는 시선을 지녔다. SNS에서 #‘쿨리시동coolishdong’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회사에서 독립 후 동명의 마케팅 컴퍼니를 설립해 라이프 에티켓 브랜드 ‘희녹hinok’의 마케팅을 맡았다. 패션, 뷰티, 라이프스타일 등 영역에 제한을 두지 않고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는 그는 ‘#쿨동시티투어’라는 해시태그와 함께 자신만의 시선이 담긴 콘텐츠를 쌓아 올리는 중이다. 한석동은 좋은 것들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것을 포착하고 경험하며, 소개하는 일을 지속해오고 있다.

  • 한 뭉티기 하실라예?
    노포 인 더 시티 (1) | 한석동
  • Edit Jihyun Cho PhotographSukdong Han, Yeseul Jun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