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건축물이 빚은 시간의 여백 응시와 사유 (1) | 이민경

“편한 운동화 신고 와. 등산화면 제일 좋고.” 사유원을 함께 방문하기로 한 지인은 출발 전날 내게 이렇게 당부했다. 오랜 일본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제일 먼저 여행하고 싶었던 곳. 경북 군위의 깊은 숲속에 자리한 사유원을 이번 대구 산책의 첫 행선지로 삼았다. 대구 시내와도 차로 불과 40분 거리라 이곳 시민들이 나들이 겸 즐겨 찾는 장소라고 듣기도 했고.

늦가을의 청명한 아침, 서울에서 4시간을 꼬박 달려 도착한 사유원은 태창철강의 유재성 회장이 10만평(33만㎡)에 달하는 군위 산자락에 지은 수목원이다. 태창철강은 대구를 대표하는 중견 기업으로 철강 자재 유통과 가공업을 하는 회사다. 철강 회사가 만든 곳이라니 건축물은 또 얼마나 근사할까, 숲속으로 한 발 한 발 걸어 들어갈 때마다 눈앞에 펼쳐질 풍광에 내심 마음이 부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가 알바루 시자Álvaro Siza와 승효상, 최욱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예기치 않는 순간 눈앞에 불쑥불쑥 튀어나온다고 했으니까.

이름 그대로 고요한 사색의 공간을 표방하기 때문에 코스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천천히, 바람의 흐름과 나무의 움직임을 느끼며 자유로이 걸으면 될 일이다. 우리가 맨 처음 찾은 곳은 사유원의 경치를 먼 발치에서 조망할 수 있는 ‘소대’와 아무 장식도 없는 좁은 V자 형태의 ‘소요헌’이었다. 아름다운 산세를 조망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렸던 소대는 우리가 서 있는 곳이 굉장히 드물고 특별한 공간임을 일깨워주었다. 특히 소요헌은 공간의 시퀀스가 만들어내는 웅장함이 인상적이었는데, 대지 안으로 낮게 설계된 공간은 건물 자체로 육중한 존재감을 드러내기보다는 자연 속에 자연스레 빨려 들어가는 듯 묘한 느낌을 주었다. 신기하게도 머릿속에 ‘Void빈 공간’란 표현이 떠다녔다. 건물이 마음에 커다란 여백을 만들어주는 느낌이랄까. 단순한 외관 때문만은 아니고 적절한 비율과 형태로 시적인 풍광을 직조하는 그의 감각이 놀라웠다.

위를 올려다보니 콘크리트 덩어리가 만든 창 안에 유유히 흘러가는 파란 하늘과 구름이 보였다. 마치 액자 속 그림이 움직이듯,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평화로웠다. 무엇보다 이곳이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은 내킬 때 언제든 쉴 수 있도록 의자를 여기저기 배치했다는 것. 공간을 헤매듯 걷다 하릴없는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어느새 빈 공간은 새소리와 나무에 달린 마른 잎사귀가 흔들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평소엔 깨닫지 못하던 소리들. 그 속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와 나른하고 느릿한 춤을 추었다. 시시각각 다른 햇살과 그늘이 드라마틱한 신Scene을 만들어주는 이곳은 자연이야말로 공간을 완성시키는 방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듯했다. “건축가는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실재를 변형할 뿐이다.” 이곳을 설계한 알바루 시자가 한 말이 귓가에 맴돈다. 자연과 건축물이 빚어낸 이곳의 여백은 어쩌면 대단한 명상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면서 쉬이 잊고 사는 것들의 가치를 잊지 말라고 넌지시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가 하면 사유원 북쪽 봉우리에는 ‘명정’이라는 침묵의 공간이 있다. 건축가 승효상이 오로지 명상을 위해 설계한 곳이다. 골짜기와 같이 깊은 콘크리트 벽 사이 가파른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아래로 서서히 침잠하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 이내 뻥 뚫린 무대 공간과 함께 눈앞에 물이 내려오는 벽을 마주하게 된다. 동선의 구성과 재료의 기법, 레드 컬러 포인트의 조화에서 어쩐지 동서양이 묘하게 혼합된 인상을 받았다. 특히 일본에 살 때 안도 다다오Tadao Ando의 건축 기행차 방문한 아와지섬의 ‘물의 절’, 가나자와시에 자리한 D.T. 스즈키 뮤지엄D.T. Suzuki Museum이 스치듯 지나갔고, 프랑스 파리의 건축물 팔레 루아얄Palais Royal의 기둥과 강렬한 컬러 대비, 직선의 비율 같은 것들이 그 위로 묘하게 겹쳐졌다. 고요한 공간 속에 흐르는 것은 물소리와 유유자적한 가을바람뿐. 중앙에 놓인 최재훈 작가의 ‘달항아리’를 보고 있노라니 잠시나마 마음의 때가 깨끗하게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언젠가 도쿄에서 느긋하게 흘려 보낸 말없는 시간도, 삶의 어느 길목 내게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공간이었다.

이 외에도 수목원의 가장 깊숙한 계곡 안에 위치한 5개의 연못과 연못을 잇는 기다란 건축물 ‘와사’, 우아하고 정결한 형태의 ‘내심낙원’ 등도 인상 깊었지만, 사실 사유원에서 내가 정작 놀란 것은 건축물 자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자연과 어떻게 조응하는지, 자연이 돋보이도록 어떻게 자신을 낮추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건물이 놓이는 자리에 위치한 나무를 베는 대신, 건물에 구멍을 뚫어 나무를 있는 그대로 통과시킨다든지(와사),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못하는 곳에 새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고(조사), 혹은 수목원 곳곳에 동물들이 목을 축이고 쉬어 갈 수 있도록 작은 쉼터를 만드는 등 자연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담긴 설계는 사유원이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는 작지만 섬세한 디테일이요 단서들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정원 ‘풍설기천년’을 마주했을 땐 사유원이 결국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 풍상을 이겨낸 모과나무 108그루가 식재된 이 정원은 사실 사유원의 시작이 된 곳이기도 하다. 설립자가 30여 년 전 일본으로 밀반출되려던 300년 된 모과나무를 하나둘 수집한 것이 사유원의 모태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조경가 정영선과 가와기시 마쓰노부Matsunobu Kawagishi가 정성껏 구성하고 가꿔 오늘에 이르렀다고. 가을 햇살을 받아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정원은 사진으로 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비현실적 풍경 속을 걸으며 어쩐지 가슴이 먹먹하고 웅장해졌다. 비단 돈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나는 한 사람의 철학과 신념이 오랜 시간과 정성을 들여 지키고 가꾼 것이 다름 아닌 자연이라는 사실에, 그리고 이를 통해 많은 이에게 감동과 위로의 순간을 선물해주겠다는 설립자의 배포가 참으로 놀라웠다. 모과나무뿐 아니라 다수의 귀한 나무를 수집한다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보다 더 미래지향적인 럭셔리가 또 있을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사유원이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참정신을 담고 있는 공간인 것이다.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해가 뉘엿뉘엿 일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어느덧 4시간이 훌쩍. 가파른 산길을 벅찬 마음으로 걸어 내려왔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억새밭, 호랑가시나무의 빨간 열매, 돌을 뒤덮은 건강하고 푸른 이끼들, 잎사귀에 맺힌 영롱한 이슬⋯.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공평하고 아름다운 호사는 대부분 길 위에 있다. 여유를 갖고 눈길을 주면 얼마든지 내 안에 가득 담을 수 있는 것들. 숲속 어디선가 풍겨오는 낙엽 태우는 냄새를 맡으며, 그렇게 또 하나의 계절을 넘는다.

사유원

‘현대인을 위한 수도원’을 표방하는 곳. 꽃과 나무, 건축물이 함께 사유하는 정원을 이룬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50

@sayuwon

남천고택

1836년경 경북 한밤마을에 지은, 군위군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여느 한옥마을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고즈넉한 정취가 있다.

 

경북 군위군 부계면 대율리

공식 홈페이지

사실 군위에서 묵을 만한 숙소는 그다지 많지 않다. 동행한 지인은 그래도 가볼 만한 곳이 하나 있다며 남천고택을 추천했다. 알고 보니 SNS상에서 여러 번 접했던 곳이었다. 군위군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ㅁ자 형 구조의 한옥으로 되어 있고, 제주도의 한적한 마을을 연상시키듯 돌담길이 집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터라 체계적인 예약 시스템이나 편리하게 개조된 현대적 시설 같은 것은 없지만 큰 불편함 없이 충분히 편안한 하룻밤을 보냈다. 한편에 아직도 남아 있는 아궁이, 지게를 비롯한 각종 소도구, 시골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다란 감나무와 된장·고추장 등이 담긴 장독대가 정겹고 신기해서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도착한 날, 김장을 한 주인아주머니는 몸이 힘들다며 간소한 저녁 식사를 준비해주겠다고 했는데, 신선한 대구가 듬뿍 들어간 대구탕과 호박전, 김치, 몇 가지 반찬이 모두 맛깔스러워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우리는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지친 몸을 지지며 늦은 밤까지 와인을 기울였다.

이민경

잡지 <스타일 H>, <인스타일Instyle> 패션 에디터, 현대카드에서 콘텐츠 마케팅 관련 일을 했다. 오랜 기간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감각으로 도쿄라는 도시를 하나의 브랜드로 비춰 다층적 시선으로 풀어낸 책 <도쿄 큐레이션>을 썼다. 500페이지가량의 두꺼운 책에는 6년간 도쿄에 머물며 도시를 관찰한 깊이 있는 풍경이 담겨 있다. “들어가 봐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는 책의 첫 문장처럼, 작가는 실제로 오랜 취재를 통해 자신이 마주하고 경험한 순간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내며, 일상 속 크고 작은 영감을 통해 삶의 태도를 탐구한다.

  • 자연과 건축물이 빚은 시간의 여백
    응시와 사유 (1) | 이민경
  • EditChaeeun Oh PhotographMinkyung Lee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