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영화관을 둘러싼 시간에 대해 소설가 지돈 씨의 일일 (2)|정지돈

내 기억의 중심엔 늘 영화관이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와 시내 나들이를 가면 그날 일정은 매번 영화관을 중심으로 짰다. 영화 상영 시간은 정해져 있으니 앞뒤로 쇼핑을 하거나 밥을 먹거나 하는 식이다. 당시 우리 가족이 자주 가던 곳은 동성로의 한일극장이다. 나는 한일극장에서 어린 시절의 우상인 실베스터 스탤론이 나오는 <클리프행어Cliffhanger>를 봤고(100m가 넘는 줄이 있었는데 암표를 파는 아버지 후배 덕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햇병아리인 키아누 리브스와 산드라 블록이 나오는 <스피드Speed>를 봤고(세상에 그렇게 재밌는 영화는 처음이었다), 혼자 극장에 갈 수 있게 된 뒤에는 대구극장에서 <미션 임파서블 1Mission: Impossible>을 봤고(인생 영화!), 만경관에서 <데블스 오운The Devil’s Own>을 봤다(망작…).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 온 뒤로는 예술 영화관을 주로 다녔다. 서울아트시네마시네큐브, 하이퍼텍나다 같은 곳들. 그즈음 지역의 영화관들은 하나둘 메가박스나 CGV 같은 대기업 체인에 잠식당하고 있어 추억을 되짚으려 한일극장을 가려 해도 갈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대구의 지역 극장인 만경관은 MMC만경관이라는 이름의 멀티플렉스로 바뀌었고, 지금은 롯데시네마 만경점이 되었다. 만경관은 1922년 조선인 사업가 이재필이 개관한 극장이다. 조선인 자본으로 세운 영남 지역 최초의 극장이었다고 한다. 거의 100년의 세월 동안 대구 사람들의 여가를 책임졌지만, 사라질 때는 별다른 기억이나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소년이었고 자연스레 영화관 주변을 자주 걸었다. 걷다가 지치면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만경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상감영공원은 내가 어린 시절만 해도 중앙공원이라는 이름의 작은 공원이었다. 같은 시내지만 동성로 주변과는 전혀 다른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고, 10대들은 거의 오지 않았다. 중앙공원 구석에서 음울한 표정으로 소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우던 중년 아저씨들이 떠오른다.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이리 와보라며 손짓하던 아저씨도 있었다. 그 뒤에 어떤 일이 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흑백필름처럼 자글자글한 인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 아저씨들은 어디로 갔을까. 만경관, 중앙공원과 함께 그들도 사라진 걸까.

오오극장은 롯데시네마 만경점에서 겨우 1분 떨어진 거리에 있다. 정말 옆옆옆 건물이다. 과거의 만경관보다 규모도 훨씬 작고 상영하는 영화의 종류도 다르지만, 오오극장을 갈 때면 만경관에서 영화를 보던 기억이 떠오른다. 만경관이 대구 최초로 세워진 조선인 극장이었다면 오오극장은 지역 최초의 독립 영화 전용관이다. 2020년 가을 즈음 강연을 해달라는 오오극장의 초대를 받았다. 주제는 영화 에세이 쓰기. 그때 처음 오오극장의 존재를 알았다.

강연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주변을 걸었다. 만경관의 거리를 산책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오오극장의 거리를 돌아다녔다. 경상감영공원과 대구근대역사관을 지났고 길 건너 약전 골목까지 내려갔다가 곽병원 쪽으로 돌아왔다. 과거에는 음울해 보였던 거리와 건물들이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낡은 건물들 사이사이 젊은 사람들이 개조한 카페나 숍이 들어서 있었고, 중앙상가의 오래된 국밥집은 유튜브 방송 덕에 맛집이 되어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오오극장

2015년에 문 연 국내 지역 최초의 독립영화 전용관. 55석의 좌석 수에서 이름을 딴 오오극장은 ‘커뮤니티 시네마’를 지향하며, 아늑하고 경쾌한 분위기가 인상적이다.

 

대구시 중구 국채보상로 537 (수동) 1층

@55cine

오오극장 안에도 카페가 있었다. 이름은 삼삼. 그러니까 오오극장은 삼삼오오 커피를 마시고 영화를 보는 곳이다. 영화를 좋아하는 대구의 소녀소년이, 대학생과 중년과 노년의 외로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곳. 그런 일이 편견과 오해 없이 기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오오극장엔 삼삼카페 말고 매력적인 존재가 또 하나 있다. 벽 너머에서, 의자 뒤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미는 얼룩무늬 고양이다. 이름은 오우삼.. 혹시 모르는 분이 있을까 부연하면 오우삼은 영화 <영웅본색>의 감독이다. 만경관은 1987년 <영웅본색>을 상영했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장뤼크 고다르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심지어 아직 지나가지도 않았다.”

정지돈

소설가 정지돈은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여 년 전 대구를 떠나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소설과 산문을 쓴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중편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 장편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모든 것은 영원했다>, <···스크롤!>, 산문집 <문학의 기쁨>(공저), <영화와 시>,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등을 썼다. 20세기에 도시를 걷고 사유한 소설가 구보씨가 있다면, 정지돈은 ‘21세기의 도시 산책자’로 종종 세계 도시의 곳곳을 걷고 산책하며 도시라는 말에 잠재된 무언가를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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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지돈 씨의 일일 (2)|정지돈
  • EditDanbee Bae PhotographJidon Jung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