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소설가 지돈 씨의 일일 (1) | 정지돈

대구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산책을 한 기억은 없다. 친구들과 걷거나 연인과 걷거나 혼자 걸으며 헤매고 방황한 기억은 있지만 그때는 걷기를 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어려서였을까. 내가 10대였을 때만 해도 취미가 ‘산책’이라고 했다가는 비웃음을 당했다. 대학을 다니던 20대 중반에도 남는 시간에 산책을 한다고 말했다가 ‘잘난 척한다’, ‘고상한 척한다’는 식의 놀림을 받았다. 이제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나만의 산책로를 찾고, 산책로가 없으면 만들거나, 심지어 산책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가는 이도 있으니까.

대구를 떠난 지 20년이 됐고 어떤 면에서 내게 대구는 외국에 가까운 여행지로 느껴진다. 대구에서 산책을 한다는 생각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산책? 어디를 걸어야 하지? 유년기에 살던 복현동을 걸을까? 10대를 보낸 수성못을 걸을까? 그즈음 유원지인 수성랜드가 생겼다. 작고 삐걱대는 바이킹을 종종 탔고 그때마다 바이킹의 고리가 끊어져 수성못에 빠지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산책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고 시도도 하지 않았다. 수성못 주변엔 포장마차가 가득 늘어서 있었고 모두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나는 대구 산책을 순수하게 낯선 도시를 간다는 관점에서 상상하기로 했다. 고향이지만 여행지인 것처럼, 과거의 눈이 아닌 현재의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하면 과거와 현재의 순서가 역전되지 않을까. 현재 속에서 과거의 기억은 새롭게 발견되고, 도시는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재구성될지도 모른다. 산책의 도시 대구로 말이다.

낯선 도시를 방문할 때 내가 제일 먼저 찾는 장소는 미술관이다. 미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미술관을 둘러싼 환경이 좋아서다. 잘 만들어진 미술관 근처에는 멋진 카페도 있고 산책로도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공공 미술관의 경우 시에서 계획적으로 공원을 조성하고 상권을 형성했을 수도 있고 미술관을 찾는 예술가나 관람객의 성향 때문에 부속 공간이 생겼을 수도 있다. 여하튼 그래서 나는 대구에 어떤 미술관이 있는지 찾아봤다. 새삼 깨달은 건 내가 대구에서 한 번도 미술관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후보지는 두 곳이었다. 2011년에 개관한 수성구의 ‘대구시립미술관’과 2018년에 개관한 삼덕동의 대안 미술 공간 ‘공간독립’. 고민 끝에 공간독립과 그 주변을 걷기로 했다. 대구시립미술관 주변은 뭐랄까, 그냥 허허벌판이다. 공원과 산이 있긴 하지만, 접근성이 좋지 않고 산책하기에는 스케일이 크다. 반면 공간독립이 있는 삼덕동은 대구의 구도심으로 골목 곳곳에 오래된 근대 건축물과 젊고 신선한 분위기의 숍들이 섞여 있다. 블록도 작아서 한두 시간이면 충분히 돌 수 있다. 도시 산책으로 완벽한 코스다.

대안미술공간 공간독립

삼덕2가에 위치한 적산가옥 형태의 대안미술공간이자 전시 공간. 과거에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신재모 선생이 살던 집이다.

 

대구시 중구 공평로8길 14-7

@spacedokrip

공간독립은 대구 삼덕동의 구옥을 개조한 대안 갤러리다. 원래는 대구노동친목계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신재모 선생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2010년경부터 ‘썬데이페이퍼’와 ‘아트클럽 삼덕’ 등에서 전시를 열고 미술 활동을 지원하는 곳으로 운영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에는 전시를 준비 중이었다. 오래된 대문 사이로 살짝 들여다보니 큐레이터와 작가로 보이는 분들이 한창 작업 중이었다. 나는 골목을 나와 한국은행과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이 있는 대로를 건너 신천 방면으로 천천히 걸었다. 골목 구석구석 발길 닿는 대로 걸으며 다양한 형태의 집과 숍을 구경했다. 근대에 지은 적산가옥이 많은 구도심이라 그런지 일본어로 된 간판이 종종 보였다. 마치 도쿄의 어느 소박한 골목에 온 느낌이었다. 깨끗하게 다듬어놓은 정원이 있는 한옥은 요리 주점으로 운영 중이었다. 사진을 찍고 있으니 사장인 듯한 젊은 남자가 나왔다. “아직 오픈 시간 전이라서요. 예약하시겠어요?”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다음에 올게요.”

정지돈

소설가 정지돈은 198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20여 년 전 대구를 떠나 현재 서울을 기반으로 소설과 산문을 쓴다. 2013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내가 싸우듯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서 살 것이다>,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중편소설 <야간 경비원의 일기>, 장편소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모든 것은 영원했다>, <···스크롤!>, 산문집 <문학의 기쁨>(공저), <영화와 시>, <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등을 썼다. 20세기에 도시를 걷고 사유한 소설가 구보씨가 있다면, 정지돈은 ‘21세기의 도시 산책자’로 종종 세계 도시의 곳곳을 걷고 산책하며 도시라는 말에 잠재된 무언가를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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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ditDanbee Bae PhotographJidon Jung, Youngmin Bae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