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복주 김일환복과 행운을 담은 술
60년이 넘는 세월, 자비 정신을 담아 만들어가는 술.
수 세기 전, 우리는 빛을 찾았다. 모닥불에서 초, 초에서 백열전구, 백열전구에서 LED. 인간이 만들어낸 빛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다양한 빛만큼 우리는 상황에 맞는 조명을 켜 그 빛 속에서 적당량의 따스한 시간을 보냈다. 1960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작은 전업사로 시작해 1962년 반세기 넘게 백열전구를 만들어온 일광전구공업사는 1986년 ‘일광’으로 회사명을 교체 후, 2013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조명 기구 회사로서 ‘IK 일광전구’라는 브랜드명으로 도약했다. 2022년 10월 백열전구 생산은 중단했지만, 향후 5년의 물량은 확보해둔 IK 일광전구. 우리가 어떤 빛 속에서 보낸 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IK 일광전구는 ‘전구’라는 광원을 만들어내는 본질은 유지하되, 광원을 잘 이해하는 조명 기구 회사로 나아가는 중이다.
수 세기 전, 우리는 빛을 찾았다. 모닥불에서 초, 초에서 백열전구, 백열전구에서 LED. 인간이 만들어낸 빛은 그 종류가 다양했다. 다양한 빛만큼 우리는 상황에 맞는 조명을 켜 그 빛 속에서 적당량의 따스한 시간을 보냈다. 1960년 대구 서문시장에서 작은 전업사로 시작해 1962년 반세기 넘게 백열전구를 만들어온 일광전구공업사는 1986년 ‘일광’으로 회사명을 교체 후, 2013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조명 기구 회사로서 ‘IK 일광전구’라는 브랜드명으로 도약했다. 2022년 10월 백열전구 생산은 중단했지만, 향후 5년의 물량은 확보해둔 IK 일광전구. 우리가 어떤 빛 속에서 보낸 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처럼, IK 일광전구는 ‘전구’라는 광원을 만들어내는 본질은 유지하되, 광원을 잘 이해하는 조명 기구 회사로 나아가는 중이다.
김시연(마케팅 팀장) 제가 회사에 합류하기 전인 2016년부터 서울리빙디자인페어에 나갔으니 올해로 여덟 번째네요. 서울리빙디자인페어는 일광전구로선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는 창구이자 연간 계획을 세울 때 중요하게 고려하는 행사입니다. 올해는 ‘포터블Portable’이라는 키워드를 전략적으로 전개할 예정이라 페어에서도 포터블 제품을 중점적으로 소개했어요. 포터블 시장 진입을 결심한 지는 꽤 됐는데, 일광전구만의 관점으로 포터블을 바라보기에 기획 단계부터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소재와 공법으로 수차례 실험을 거친 뒤 선보일 수 있었습니다. 다른 중요한 제품이 몇 가지 더 있지만, 서울리빙디자인페어를 시작으로 올해 ‘IK일광전구의 스노우맨 포터블’이라는 키워드 하나만큼은 조명 기구 시장에 강력하게 남기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김시연 스노우맨은 2021년 12월에 출시했어요. IK를 기획하기 시작하면서 다음 스텝의 기반이자 발판으로 삼은 제품이죠. 출시하자마자 곧바로 반응이 왔어요. 스노우맨을 만들기 위해 그 전에 ‘에이콘’, ‘프로그’ 제품들이 빌드업 역할을 해주었고요. 에이콘이나 프로그의 주 소재는 알루미늄인데, 이후부터 유리 제품을 만들어보기로 계획을 세웠죠. 에이콘, 프로그는 빛을 모아서 아래로 떨어뜨리는 반면, 스노우는 빛을 사방으로 퍼뜨리는 방식이에요. 디자인이나 설계, 제작 과정도 복잡한 편이죠. 기존에 저희 매형인 권순만 디자인 팀장님이 워낙 잘 진행해왔고, 저는 스노우맨 제품과 관련해 마케팅과 접점을 이룰 수 있는 제품의 구조와 소재에 대해 꾸준히 의견을 전했습니다.
2020년 말 IK 일광전구에 합류한 김시연 마케팅 팀장.
집무를 보는 개인 공간에서 김홍도 대표.
김홍도(대표) 처음에 전업사를 시작한 분은 저희 어머니예요. 스물한 살에 대구의 가난한 시골집으로 시집을 오셨는데, 누님과 저 그리고 막냇동생을 낳고 키우려면 농사 조금 짓는 것만으로는 안 되더라는 거예요. 어머니께서 콩나물을 직접 키워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10km 정도의 거리를 오가며 파시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서문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대요. 그렇게 서문시장에 전업사를 차려 운영하셨죠. 그게 1960년도의 일이에요. 어머니는 장사 수완이 무척 좋으셨습니다. 제품 진열도 잘하시는 데다 제 동생을 업고 장사를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측은지심이 생겨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어머니 전업사에서 사는 거예요. 그렇게 10개월 정도 혼자 장사를 하시다가 아버지도 하던 일을 접고 전업사에 합류해 일하기 시작하셨어요. 그 와중에 어머니께서 전업사를 하면서 품목을 추가한 것이 바로 전구죠.
김홍도 이제 막 전구를 들여 팔던 당시 농촌에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했어요. 1961년에 전구를 엄청나게 많이 파셨죠. 전업사에 가지고 오는 대로 다 팔렸어요. 그때 우리나라에 굴지의 전구 공장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파는 전구 가격보다 더 저렴하게, 유리한 가격으로 팔면 전구를 더 많이 팔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하셨대요. 그야말로 박리다매인 거죠. 그러다가 부산에 있던 평화전구의 대구 대리점을 운영하면서 평화전구의 물량을 다 가져와 어머니께서 파셨는데, 그 시절에는 선금을 줘야만 물건을 사 올 수 있었어요. 물건값을 잔뜩 치른 1961년 어느 날 평화전구에 부도가 난 거예요. 평화전구에 찾아가니 사장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하시더래요. 전구 만드는 기계를 현물로 줄 테니 앞으로 전구를 생산하게 되면 부산 대리점은 자기한테 달라는 거였죠. 자신이 보유한 전구 생산 기술과 기계를 아버님께 전수하는 조건으로 공장을 차려달라고 했습니다. 그 물건은 사장님이 다시 팔고요. 역할이 바뀐 셈이죠. 그렇게 1962년 9월, 내당동에 50평(165㎡) 정도 되는 초가집을 사서 전구 생산 시설을 정비해 일광전구공업사가 시작됐어요.
1대 회장인 고 김만규 회장의 모습.
김홍도 제가 알기로 1970년대 당시 전국에 3대 시장이 있었어요. 서울의 동대문시장, 부산의 국제시장, 그 다음이 대구의 서문시장이에요. 서문시장의 규모가 왜 큰가 하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섬유가 대구에서 거래됐죠. 생산지가 다른 지역이라 하더라도 대구에 섬유시장이 형성되어 있으니 다 여기로 와서 물건을 사고팔았어요. 초등학교 4학년부터 부모님 심부름 삼아, 용돈벌이 삼아 자전거를 타고 서문시장에서 전구 배달을 다녔습니다. 지금도 시장통의 모습이 생생해요. 그때 서문시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러다가1973년에 대구 최초의 공단이 만들어졌어요. 대구 북구 노원동에 있는 대구 제3공단이에요. 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공단입니다. 서문시장 전업사는 그대로 운영하고 있고, 그때 공단이 만들어지면서 내당동 50평 규모의 첫 공장을 600평(1,980㎡) 규모의 부지를 분양받아 이전했죠.
김홍도 1980년대와 1990년대는 정말 드라마틱한 시대였어요. 1980년대는 일광전구가 급성장을 이룬 호시절이었고, 1990년대는 여러 상황이 겹쳐 어려운 시기였죠. 1980년대는 일광전구뿐 아니라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정점을 맞은 국내 산업의 호황기였어요. 저희도 그때 북미 지역으로 수출을 많이 했습니다. 캐나다에 고정 거래처가 있었고, 또 하나는 미국의 월마트였어요. 월마트에서 우리나라 전구류를 어마어마하게 수입해 갔어요. 1980년대 당시 미국의 ‘지이GE’, ‘필립스PHILIPS’, ‘오스람OSRAM’ 이 3사에서 생산하는 제품만 취급하다가 한국의 가정용 전구를 수입해 판매하기 시작한 거죠. 미국의 소비자가 기존 30센트에 가정용 백열전구를 샀다면, 당시 우리 수출가는 7~8센트였으니까 가격 차이가 얼마나 크겠어요. 생산량의 한 70% 정도를 전량 수출하고 내수는 한 30% 정도만 하는 그런 시대가 있었는데, 한 7~8년 유지되다가 1990년 초에 중국 시장이 개방되면서 상황이 안 좋아진 거예요. 우리가 12~13센트에 전구를 팔았다면, 중국은 3~4센트에 팔았어요. 품질 수준은 크게 차이가 안 나고요. 전구뿐 아니라 의류, 각종 생필품에도 이런 영향이 미치면서 우리나라 수출 산업에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일었죠. 수출을 주력으로 하던 회사들이 국내시장으로 다시 모든 걸 끌어들이니 회사 상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고, 그러다가 IMF가 터진 겁니다.
김홍도 당시 저는 서른네 살에 대구의 시내버스 업체를 인수해 운수회사 5년 차 사장으로 일하고 있었어요. 대구의 30개 내외 시내버스 업체 중 수익성 꼴지를 기록한 운수회사를 3년 만에 일으키고, 전반적인 수익률의 모든 지표를 최상위에 안착시킨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저를 불러 말씀하셨죠. 회사 문을 닫아야 할 것 같은데, 장남인 제가 하겠다고 하면 맡기시겠다고요. 부도 위기의 운수회사를 재기시키며 회사 경영에 대한 자신감이 붙은 상태인 데다 무엇보다 일광전구는 제가 아는 회사잖아요. 어릴 적부터 아버님이 운영하는 걸 직접 봐온 회사죠. 아닌 게 아니라 IMF가 오는 시점부터 일광전구 역시 큰 파장이 있을 수 있겠다는 걱정을 했어요. 자수성가한 분들은 고집이 대단합니다. 저희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셨죠. 그래서 딱 일주일 생각할 시간을 갖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제가 하겠다고요. 그 대신 아버지가 사업에서 완전히 손을 놓으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래야 제 소신껏 회사를 운영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제 말을 듣던 아버지는 바로 흔쾌히 수락하셨죠. 그리고 일광전구에 들어가 딱 1년 운영하고 에디슨이 발명해 최초로 탄생한 가정용 백열전구의 IEC 기존 규격을 벗어나 지름이 조금 더 작은 일광전구만의 전구를 만들었습니다. 사이즈가 작아지니 5t짜리 트럭에 기존 8만 개를 실었다면, 10만 개를 실을 수 있었죠. 창고 사이즈가 축소되니 매장 사용 공간도 줄었고요. 그렇게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며 열심히 전구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김시연 사실 아버지를 자주 못 봤어요. 사업이 한창 진행될 때는 워낙 바쁘셨으니까요. 당시 아버지의 모습 중 특별히 제게 와닿은 점이라고 하면 성실함이 가장 크겠죠. 시대적 한계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고비들이 있었는지, 또 얼마나 어려웠는지 전해들어서 아버지가 하신 몫의 절반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고 어렴풋하게 느꼈던 것 같아요.
백열전구는 1800년대에 에디슨이 모닥불을 가장 잘 해석해 만든 사회산업의 아이콘.
김홍도 일단 사업을 하는 사람에게 위기가 없으면 안 됩니다. 요동쳐야 기회가 옵니다. 늘 준비해야 하죠. 저는 관찰하기를 참 좋아해요. 일광전구를 운영하며 선진 문물을 경험하기 위해 미국, 일본 등으로 출장을 많이 다녔어요. 이 분야의 1등을 직접 보고 경험해야 지금 내가 몇 등인지 알 수 있는 법이죠. 1896년 일본 최초로 백열전구를 생산하던 회사인 ‘도시바TOSHIBA’에 다녀왔습니다. 도시바는 당시 동남아 시장을 장악한 전구업체의 최강자였어요. 공장을 견학하면서 생산 및 품질 관리를 직접 보고 왔어요. 지금 내가 경영권을 잡은 일광전구의 현 위치는 어디에 있고, 또 어디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살핀 것이죠. 결국은 수출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양산의 길은 ‘볼륨 생산’에 있고, 그렇지 않으면 수익을 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이죠. 전구라는 것도 좋은 제품을 만들어서 나아가야 해요. 그렇게 볼륨 생산을 하며 어느 시점에 신제품을 계속 만들어냈어요. 국제사회의 백열전구 퇴출 결의로 정부에서는 2014년부터 가정용 백열전구를 금지한다고 발표했고, 그 사이 회사의 주력 제품을 가정용 전구에서 장식용 전구로 전환했어요. 가정용 전구가 매출의 70%를 차지했는데, 그걸 30%로 낮췄습니다. 그리고 장식용 전구 중에서 유리구의 디자인과 성능을 다양하게 만들면 여러 기회가 생기겠다고 생각했죠. 일광전구가 마지막까지 버틸 수 있던 이유는 결국 타사는 하지 않는 차별화된 제품을 만들어내는 데 있었다고 봐요. 저는 항상 전구를 똑같이 만들지 않았어요. 당장 수익이 나지 않더라도 일광전구만의 제품이 있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사의 오리지널리티를 지닌 제품을 20개 정도만 보유하고 있어도 회사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제 모토 중 하나기도 합니다.
김홍도 인류는 불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모닥불에서 시작된 150만 년이라는 역사를 가진 인류예요. 그 DNA는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을 겁니다. 1800년대에 에디슨이 모닥불을 가장 잘 해석한 백열전구를 만들어냈고, 모닥불에 대해 해석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제품은 없을 거라고 장담합니다. 백열전구는 1800년대에 만들어져 아직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해 사용하는 공산품인 거예요. 산업사회의 아이콘인 백열전구는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초를 생각해보세요. 고급 레스토랑에 가면 여전히 초를 켜 테이블을 밝히잖아요. 없어질 수가 없죠. 과거에는 백열전구, 할로겐, 방폭 전구, 방전 전구 등 전구의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한데 지금은 LED로 다 통합시켰어요. 빛이 다 똑같아진 겁니다. 빛의 다양성이 사라진 거죠. 저는 LED 전구와 백열전구를 조화와 생화로 비교하곤 합니다. 생화는 조심스럽고 불편함이 있지만, 조화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지금도 백열전구를 쓰고 있어요. 60W짜리 백열전구 불빛 아래에서 음식이 가장 맛있어 보이거든요. 일광전구는 백열전구 생산을 2022년 10월부터 중단했지만, 향후 5년간 판매할 물량은 확보해두었습니다. 히말라야 같은 산악 지역은 LED 사용에 문제가 많아요. 전압도 불균형하고 주파수도 안 맞죠. 그런 조건에서는 오로지 백열전구만 불을 밝힙니다. 조금 어두울 뿐이지 흔들림이나 떨림이 없어요.
김시연 앞서 저는 건설사 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전구업계의 하락을 체감하고 있었고, 회사 매출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다고 들었죠. 일단 일광전구라는 회사의 취약점이 마케팅이라고 생각했어요. 마케팅 부서나 마케팅 조직 자체가 없었죠.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전달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는 게 요즘 저희 세대예요. 얼마나 가치 있게 전달하는지에 따라 그 가치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익률도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기획하고 그 가치를 잘 전해야 하는 그 공백에 제가 투입되어야 회사의 사업과 운영이 잘 순환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김시연 한창 판매 중이던 제품 중 일부는 일광전구가 만들고 싶은 제품이었어요. 소비자의 니즈가 충분히 리서치되지 않은 제품을 제작한 거죠. 물론 전구에 대한 애정만큼은 아버지와 일광전구 모두 대단히 크겠지만, 그래서 밖이 아니라 안의 시선, 그러니까 전구 자체에만 집중한 제품들이었어요. 처음에는 무작정 보따리 짊어지고 전국을 다니며 소비자에게 일광전구를 알리자는 주의였어요. 기존 거래처는 전구 판매처라 물건을 소화할 수 없었고, 서울 전역의 조명 기구 판매처를 찾아다녔는데, 대부분 반응이 좋지 않았죠.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2~3개월 만에 빠르게 마케팅 방향을 전환했어요. 그게 바로 하이엔드 판매처에 일광전구의 조명 기구를 판매한 것입니다. 누가 봐도 우리보다 가치가 높은 브랜드가 있는 곳을 하이엔드로 구분해 고가의 가구와 조명이 있는 곳들에 저희 제품을 입점했어요. 우리나라 조명 기구 회사 중에서 일부 브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회사들이 해결하지 못하는 지점이 바로 하이엔드 판매처에 입점이 안 된다는 거예요. 조명 기구로는 후발 주자였기에 소비자에게 IK가 오리지널 디자인을 하는 브랜드라는 점을 알리면서 오리지널 제품을 유통하는 곳에 판매해야겠다는 접점을 생각한 거예요. 제품을 좀 더 가치 있게 알릴 수 있게 되었죠.
본사의 공장 내 IK 로고가 새겨진 조명 기구 제품들.
김홍도 대표가 집무를 보고 있다.
김시연 일단 짧은 시간 안에 IK를 대중에게 알릴 수 있었던 건 오랜 시간 일광전구가 다져온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전구 회사가 서울디자인리빙페어를 8회씩이나 꾸준히 나가는 데가 어디 있겠나요. 우선은 대중의 인식 속에 ‘일광전구’라는 키워드가 자리 잡혀 있었다고 생각해요. 전구 회사인데 어딘가 디자인이 조금 남다른 데가 있는 그런 회사 정도로요. 그러다가 2년 안에 디자인 조명 기구를 많이 선보이면서 소비자가 생각하는 일광전구의 개념이 빠르게 전환된 것 같아요.
김홍도 기업은 늘 변화에 맞설 수 있는 자세를 취하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시대는 변하고, 기업은 따라가야 합니다. 지금은 과거처럼 ‘물건은 완벽하게 만들어 출시한다’는 개념만으로 제품을 만들어 파는 시대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시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변화에 맞춰서 가야죠. 오너나 책임자는 변화하는 메가트렌드 곡선의 미세한 변곡점을 눈여겨보고, 세계의 흐름을 찾는 사람입니다. 일광전구가 오래갈 수 있는 이유도 남들이 볼 수 있는 큰 변화가 아니라 미세한 변곡점을 늘 관찰해왔기 때문이지요.
김시연 마케팅 측면에서 생각하면, 누가 어떤 조명이 필요한지 관찰해야 하고, 소재나 사이즈 그리고 기능이 어떻게 차별화되어야 구매로 이어지는지 잘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이렇게 제가 관찰한 지점에 발맞춰 기업이 변화하려면, 그 기업을 만들어가는 구성원 역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제가 200%, 300% 노력해서 먼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더라고요. 그만큼의 인내와 수고로움을 감내해야 비로소 고객 가치가 실현되는 제품을 만들 수 있는 변화가 따른다고 생각해요.
김시연 계속 고민 중이에요. 앞서 변화해야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의미로, 기획하지 않으면 제품이나 서비스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봐요. 새로운 기획이 담긴 조명 기구 제품을 계속 만들어야 합니다. 물론 고객 가치에 기반한 아이디어 제품이어야 하겠죠. 이런 생각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어떤 명제를 만든다면, 도대체 그것이 어떤 조명인지 저도 계속 고민 중인 거예요. IK가 만드는 조명 기구 제품에 대한 어떤 큰 명제를 설정해 앞으로 일을 해나가고 싶고, 그러면 분명 좋은 브랜드로 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홍도 여러 가지 사업을 하면서, 또 일광전구의 부흥과 고비를 오랜 시간 봐오면서 브랜드가 살아남기 위해선 끝단으로 가야 하다고 줄곧 말해왔어요. 이를테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양극단이겠죠. 매년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스마트 시대로 변화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날로그에 대한 향수는 우리에게 여전히 남아 있죠. 알파 세대가 등장하고 모두가 유튜브를 보는 시대지만, 우리는 지금도 더 원시적인 곳으로 가 캠핑을 즐기고자 합니다.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에서 살아왔어요. 저는 일광전구의 제품이 그래야 한다고 봐요. 일광전구의 제품에 아날로그가 묻어나야 해요. 시대에 맞춰 변화하지만 일광전구가 지닌 아날로그의 본질은 유지해야 합니다. 저는 변함없이 그런 방향성을 가지고 있어요.
리브랜딩 하기 전의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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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IK 일광전구 조명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