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송빵집 박성욱정직한 마음이 만든 빵
1957년 대구에서 시작해 전국에 20개가 넘는 직영점을 운영하며 고유의 맛과 본질을 잃지 않는 삼송빵집.
부모님 고향이 창원의 덕산이라는 곳이에요. 어릴 때 그곳에서 자랐죠. 숙모님과 어머님이 길쌈과 염색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전통 섬유의 제작 과정을 경험했어요. 그 옆에서 따라 해보기도 하면서요. 아버지가 마산에서 사업을 하실 때는 자연을 접하며 자랐어요. 1,000평이 넘는 땅에 아버지의 공장만 덩그러니 있고, 주변은 온통 숲이었거든요. 봄이 되면 꽃이 피는 숲속에서 지내며 도회지와는 다른 삶을 살았죠. 꽃밭을 가꾸기도 하고, 잔디로 우리나라 지도도 만들면서요. 그러니 자연염색을 접하게 된 건 저에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죠.
가을 바람에 흩날리는 김지희 명인의 보자기 작품.
대학교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했는데, 대학 교육과정에선 전통을 중요시하지 않더라고요. 서양의 영향을 받아 현대미술을 배웠죠. 그 교육을 받고 부교수가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 없는 게 무엇인지 알고 싶어 일본으로 갔어요. 일본 동경예술대학교 대학원의 상위 과정인 연구원 과정을 수료하기 위해서죠. 일본의 교육은 전통부터 시작되더군요. 민예관에 가서 전통의 뿌리를 배우고,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고미술 시장에 가서 구매하게 하고요. 일본에서 1년 동안 공부하면서 전통부터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느꼈어요. 한국으로 돌아와선 학생들에게 전통부터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의 뿌리부터 배우기 시작하니 학생들은 서구 작품을 모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국내에도 좋은 문양과 디자인의 소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죠. 그렇게 섬유의 종류와 조직도부터 시작해 분야별로 자신들이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단지 최근 트렌드, 즉 사조와 색채가 어떤 흐름인지를 보기 위해서만 서양 서적을 참고하도록 했죠. 전통만 공부하면 외곬으로 빠지기 쉬우니까요.
대구시 동구에 자리한 자연염색박물관의 외관 입구 모습.
일본에서 염직 과정을 수료하고 돌아오면서 쪽씨 5알을 얻어 왔어요. 쪽씨는 원래 우리 것이었지만 일본으로 건너가고 한국에서는 사라졌기 때문이죠. 그러다 보니 일년초인 쪽씨가 죽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가꿔야 했어요. 지금은 동대문에만 가도 쪽씨가 있지만 옛날에는 그게 얼마나 귀했는지 몰라요. 경북과 영남 지역에는 제가, 서울에는 예용해 선생님께서, 경남 지역에는 성파 스님께서 얻어 온 쪽씨로 저변을 확대했어요. 이 세 사람이 얻어 온 쪽씨가 전국으로 퍼진 거죠.
대학교수 자리에서 정년퇴직하기 3년 전부터 박물관 설립을 준비했어요. 박물관 규모가 겉으로 보기에는 크지 않지만, 기와지붕을 올리고 황토벽을 쌓는 등 전통적 방법으로 건물을 짓다 보니 비용이 많이 들었죠. 그때만 해도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몰랐어요. 자연염색박물관에서는 염색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자연염색박물관 내 민속염직도구실에서는 염색의 기초가 되는 도구를 전시하고 있어요.
자연염색박물관에는 명인의 작품과 유물, 기증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고운 색감의 천들이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모습.
대구에서 교수 생활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섬유 도시인 대구에 자연염색박물관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박물관을 지은 뒤에는 국제회의를 위한 세미나를 이곳에서 열었어요. 유네스코 국장이 말하기를 김지희 교수는 세계를 통틀어 자연염색박물관을 최초로 차린 사람이라도 하더군요. 그때 자부심도 많이 느꼈고, 그 후 국제공모전에서 감사하게도 1988년 유네스코 올해의 공예상UNESCO Award of Excellence for Handicrafts을 수상하게 됐습니다.
인간이 빈 몸으로 태어나듯이, 자연염색도 처음에는 흰 천으로 시작해 물이 들어요. 자연염색의 특성상 물이 들면 금세 바래요. 옛날에는 이 바랜 천에 다시 물을 들이고, 천이 해지면 기워 입고, 또다시 바래면 물들이는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하지만 천은 바래면 바랜 대로 아름다워요. 화학 염료와 달리 바랜 색깔이 아름답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반복하면 결국 천은 다시 하얗게 돼요. 빈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과 같죠. 결국 자연의 섭리, 인간의 순환과 같은 것이 자연염색이에요.
제가 인간문화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인간문화재가 되면 전통만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현대미술을 접목하지 못하고 옛날 작품을 재현하는 데에서 그쳐야 하죠. 외국에서 저를 초청할 때 제가 전통만 고집했다면 초대하지 않았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현대미술을 했기 때문에 외국에도 우리나라의 예술을 알릴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1980년대 시대사조는 작품의 기법이 벽에서부터 나오는 시기였어요. 평면에 그린 그림이나 자수가 아닌 설치미술적인 것이죠. 1990년도 초에는 다시 벽으로 회귀했고요. 그러한 사조를 작품에 반영하고자 했어요. 가죽과 칠보를 이용해 대작을 만들기도했고요. 재료에 한계를 두지 않고 작가가 할 수 있는 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이렇듯 시대사조를 무시해서는 안 돼요. 시대가 각박할 때는 색채의 흐름도 그 사조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세계 사람들이 곧 사조예요. 리드미컬하게 변화하죠. 명인으로서 활동할 때는 전통적인 것에, 작가로서 활동할 때는 현대적인 것에 중점을 둡니다.
자연염색은 우리나라가 시초였어요. 스스로 자라난 나무 한 그루는 천연이지만, 우리는 홍화도 잡초도 모두 직접 재배하기 때문에 천연과는 무관한 것이에요. 인간의 힘이 들어간 건 자연산이라고 하지 천연산이라고 하지 않아요. 천연은 비예술에 속하는 것입니다. 화학 염료가 나오기 전에는 다 자연염색을 했어요.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님들은 식물에서 나오는 염료를 가지고 명주 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낡으면 다시 색을 물들이고, 재봉틀이 없으니 직접 바느질을 했죠. 손으로 하는 정성이 있는 거예요. 자연염색박물관에는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 있어요. 그분들은 손으로 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세요. 정성 들여 자연염색하는 것을 말이죠. 자연염색은 처리를 잘못하면 색이 쉽게 빠져요. 하지만 네 번 정도 작업을 반복하거나 복합 염색을 하면 염료가 절대 빠지지 않죠. 이 모든 게 인내의 과정이기도 해요. 보통 공산품과는 다르게 해석하며 애정을 가지고 직접 만들어보는 데에 의의가 있죠. 그게 중요해요.
자연염색박물관에서 김지희 명인이 ‘보자기에 싼 보자기 오브제Bojagi Object wrapped up in Bojagi’ 작품의 매듭을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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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희 명인의 대표 보자기 작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