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누운 콘크리트 집하룻밤의 여행자 (2)|박선영
“그러므로 이곳은 잠시나마 나의 별서가 되는 셈이다.”
경상북도를 둘러싼 우람한 산세는 도시 대구가 품은 축복일 것이다. 대구 시내를 벗어난 지 고작 40여 분 만에 펼쳐지는 청도의 풍광은 한껏 부풀어 오른 6월의 초록으로 무성하다. 청도 매전면 동산리, 마을로 들어서는 좁은 외길은 어릴 적 외할머니 집으로 향하던 때의 정겨운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어느 것 하나 뽐냄 없이 고만고만한 지붕을 맞대고 있는 마을 한편의 작은 집, 스테이더담. 나직한 돌 담벼락 너머의 흙벽집으로 돌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살랑거리는 작은 꽃나무 사이로 드러난 본채와 별채 그리고 작은 마당. 말끔하게 단장한 이 작은 시골집에서 단 하루의 망중한을 즐길 참이다. 장거리 여행의 끝은 언제나 ‘오길 잘했다’라는 위안으로 피로를 잠재운다. 최근 나의 일상은 너무도 분주했다. 새로 이사한 서촌의 집에 적응하는 것도,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하는 일도, 급하게 치러낸 마감 원고들도 내내 즐거움의 연속이었지만 마음에 둥그런 여백을 내어주진 않았다. 그래서인지 물리적으로 서울을 잠시 떠나 있고 싶은 마음이 들던 차였다.
널찍한 툇마루가 있는 집은 단출했지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잘 갖추고 있었다. 새하얗고 푹신한 침대, 작은 식탁, 그리고 앞산의 산세를 끌어들이는 넓은 창까지. 잠시 마루에 앉아 물 한 잔을 들이켰다. 못해도 60년은 되었을 것 같은 나무 기둥과 단단한 흙벽이 한 몸으로 이 집을 받쳐주고 있었다. 오래된 물성들이 세월과 함께 뒤엉켜 하나의 존재로 수렴되어가는 모습처럼 진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을까? 이웃집에서 건너오는 투박한 말소리, 농기계의 엔진음, 과일나무로 향하는 시원스러운 분무 소리. 거기에 툇마루 아래를 거처로 삼아 자기 영역을 고수하겠다는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리에게 애교를 부리는 어린 고양이까지. 눈과 귀가 모두 선명해지는 시간이었다.
축사이던 별채에는 반듯한 저쿠지가 놓여 있었는데, 일찍 찾아오는 시골의 밤 동안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속에 누워 피로를 녹였다. 저쿠지 옆에 놓인 LP를 슬쩍 건드리니 비틀스의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반신욕을 하며 노래를 듣는다. 그것도 축축한 밤공기를 벗 삼으면서 말이다. 과도한 시각적 경험으로 채워진 도시의 일상과 달리, 이곳에서는 촉각과 후각, 청각이 한껏 예민해진다. 차갑고 반질거리는 툇마루, 뻐꾸기가 우는 소리, 피부와 맞닿은 물의 뜨거운 온도와 흘러내리던 땀, 싱그러운 밤의 냄새. 단조로움 속에 본질이 있다는 것을 믿게 되는 순간이었다.
회색 도심 속 쉼이 되어주는 곳 ‘스테이더담’은 “세상 가장 따뜻한 군락 속에 우리의 이야기를 담습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자연에서의 아늑하고 편안한 쉼을 선사한다.
경북 청도군 매전면 새터길 10-5 스테이더담(동산점)
아침에 눈을 뜨니 침대 옆 둥근 창으로 온갖 초록의 나무와 풀들이 비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그 앳된 생명력이 자신을 봐달라는 듯 너울거리고 있는 것이다. 여기, 이곳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마냥 좋았다. 마당을 서성이며 앞산과 뒷산을 천천히 둘러봤다. 마치 줌인한 화면을 보는 듯, 커다란 산이 가까이 와 있었다. 능선의 모양마저 리드미컬했다. 산세가 좋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었다. 도시가 무언가를 잃어가고 있는 만큼, 시골은 더욱 풍요롭고 아름답게 그 원형을 간직하는 게 아닐까. 스테이더담에서의 하룻밤은 ‘가장 소박한 것’들로 인해 더욱 특별하다. 온전한 여행과 휴식은 이처럼 로컬의 순수성과 관대한 자연이 있기에 가능한 일인 듯하다.
박선영
박선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아트, 디자인, 건축, 여행에 대한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08년, 휴학을 결심하고 파리에서 잠시 살기로 한 대학원생 시절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섭외하고 인터뷰해 <하퍼스 바자 코리아Harper’s BAZAAR Korea>에 기고하며 칼럼니스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보그 코리아VOGUE KOREA>, <노블레스Noblesse> 등 각종 매체에 그만의 깊은 시선과 우아한 필치가 느껴지는 글을 써오며, 문화와 예술 안팎으로 전시와 행사를 기획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전개한다. 라이프스타일의 사적 조언자로서, 특히 ‘여행’이라는 낯선 시공간에서의 감각을 직조하듯 세밀한 글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