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누운 콘크리트 집 하룻밤의 여행자 (2)|박선영

경상북도 청도, 오늘은 그곳으로 여행을 간다. 대구에서 남쪽으로 1시간 남짓 거리인 청도는 시간을 넉넉히 두고 대구를 여행할 때 들러보기 좋다. 하루를 묵을 참이고, 청도 또한 내게 낯선 곳이라 더욱 설렌다. 넉 달 만에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 청도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고 한참을 달려가니, 아직 회색조의 먼 산과 드넓은 겨울 벌판이 아스라한 풍경을 만들어낸다. 복숭아 나무 가득한 밭 옆에 커다란 콘크리트가 누워 있다. 육중한 철문을 있는 힘을 다해 밀어 열자, 콘크리트와 햇살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길게 뻗은 진입로를 만난다. ‘건축적 산책로’라 부를 법한 드라마틱한 초입의 길, 벌써 저 안의 집이 궁금해지게 만드는 풍광이다. 초록을 살포시 덮은 이끼들의 정겨운 환영을 받으며, 찬찬한 걸음으로 들어가본다.

현관문을 열자 그윽한 아로마 향이 코를 찌른다. 소파와 테이블, 의자들과 네모난 스피커가 기다란 구조가 펼쳐내는 개방감 안에 살포시 놓여 있었다. 게다가 장 푸르베Jean Prouvé라는 디자이너가 형태적 통일감을 만들어주고 있다. 너저분한 생활감이 묻어나지 않는 말끔하고 산뜻한 공간은 여행지 숙소에서 만끽할 수 있는 묘미다. 창밖은 가로형 액자처럼 프레임을 만들어 추위를 머금은 주변 풍광을 끌어들인다. 휴식 혹은 쉼을 위한 탁월한 고립이라는 느낌을 자아내는 감각이 밀려왔다. 잠시 쉬고 싶어 찾은 침실은 거실 끝 코너를 돌아 만날 수 있었고, 또 하나의 별채는 밖으로 나가 다른 작은 건물을 쓰고 있다. ‘워킹인써클walking in circles 숙소의 이름은 어떤 행위를 담고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나가고 들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걸어야 하는 동선이 인상적이다.

시골의 밤은 유난히 일찍 찾아온다. 밝은 곳이라곤 내가 머무는 이곳이 유일하다. 온통 어둠뿐인 마당 한가운데에서 에탄올과 함께 발화하는 진짜 불을 켰다. 타오르는 불 사이로 밤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는 어떤 서막 같았다. “영화나 볼까?” 누가 먼저 꺼낸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둘 소파로 모여들었다. 문득 10년도 더 지난 옛 영화의 제목이 떠올랐다. 희고 넓은 벽에 띄워진 영상이 두 시간 넘게 돌아가는 사이, 스르르 잠이 들었다. 꿈 없는 밤이 지나가고, 해가 커튼을 비집고 들어왔다. 마음껏 만끽해도 좋을 아침, 저쿠지에 들어가 어제 못 한 반신욕을 하고 나서야 진짜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냉장고에는 정갈한 대나무 바구니에 담긴 조식 키트가 놓여 있었다. 식빵과 치즈, 햄, 양상추와 머스터드소스를 차곡차곡 쌓아 오븐에 굽는 행위가 창의적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커피와 차, 가져온 몇 가지 과일을 곁들인 아침 만찬. 더 쨍하게 깊숙이 들어오던 이른 햇살 사이에서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워킹인써클

콘크리트 건물이 인상적인 경북 청도군에 위치한 스테이. ‘평범한 것이 특별해지는 곳’이라는 슬로건으로, 일상에서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집이 되고자 한다.

 

경북 청도군 화양읍 학산토평길 229-21

@walking.in.circles_

식탁에 놓여 있던 주인의 웰컴 카드를 이제야 읽는다. “이곳으로 여행을 온다는 것은 원래 있었던 나의 또 다른 집에 쉬러 가는 것에 더욱 가까운 의미입니다. 우리를 자극시키는 어떠한 것도 없으므로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잠시나마 나의 별서別墅가 되는 셈이다. 흥미로운 행위를 기대하는 것이 아닌, 비워내고 내려놓는 시간으로서의 여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반갑게도 그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은 소란한 흥미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내려놓고 있는 셈일까. 또 다른 일상으로서의 여행, 다만 그곳에는 쉼에 대한 진정한 갈망과 고립을 자처하는 마음만 필요할 것이다. 커다란 붓 자국처럼, 또 한번의 조용한 시간이 아로새겨졌다.

박선영

박선영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하고 아트, 디자인, 건축, 여행에 대한 글쓰기를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2008년, 휴학을 결심하고 파리에서 잠시 살기로 한 대학원생 시절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섭외하고 인터뷰해 <하퍼스 바자 코리아Harper’s BAZAAR Korea>에 기고하며 칼럼니스트의 삶을 시작했다. 이후 <보그 코리아VOGUE KOREA>, <노블레스Noblesse> 등 각종 매체에 그만의 깊은 시선과 우아한 필치가 느껴지는 글을 써오며, 문화와 예술 안팎으로 전시와 행사를 기획해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일을 전개한다. 라이프스타일의 사적 조언자로서, 특히 ‘여행’이라는 낯선 시공간에서의 감각을 직조하듯 세밀한 글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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