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플릭 윤동원스트리트 패션 너머의 문화
국내외 패션 브랜드를 다루는 대구 대표 스트리트 패션 편집숍.
맞습니다. 아버지께서는 1945년생이세요. 그해에 태어난 아이를 ‘해방둥이’라고 하는데, 경북 산골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죠. 지금으로 치면 대구 바로 아래 청도쯤이에요. 학교를 가려 해도 산 하나를 넘어야 했죠. 우리나라는 1960년대부터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이동했는데, 그 초창기 세대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기에 서울·부산 같은 대도시로 가는 사람이 많았는데, 아버지께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부산으로 내려오신 거예요. 65학번으로 부산국립수산대학(현 국립부경대학교)에 입학해 생선을 처음 제대로 봤다고 하셨어요. 오랜 역사를 이어가는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도 부산국립수산대학 출신일 만큼 해양 수산 분야로 명성이 자자한 학교였죠. 그곳에서 제조 가공을 전문으로 공부하고, 생산 책임자이자 초창기 멤버로 입사한 회사가 ‘삼호물산’이었어요. 우리나라 해양 수산 역사를 개척해나간 중요한 기업이죠. 당시 국내에 유통되던 명태의 절반 이상을 삼호물산이 취급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명태 사업에 특화된 기업이었어요. 고도성장기에 아버지께서는 공장장, 전무, 상무로 승진하며 쭉 일해오시다가 삼호물산이 부도가 나면서 1993년 수산 가공 라인을 인수해 만든 것이 지금의 덕화푸드예요.
아버지께서는 평생 생산 기술자로 살아오신 분이에요. 우선, 짜고 비리다는 명란의 인식을 각고의 노력으로 변화시켜나갔죠. 8~12%인 염도를 4%로 낮추고, 맑은 청주를 가미한 3일 저온 숙성법을 개발해 비린내를 제거했어요. 재래식 명란은 염도가 7~15%로 쉽게 상하지 않아 유통기한이 긴 편인데, 저염 명란의 경우 냉동 보관을 해야 할 만큼 신선도 유지가 어렵고 유통기한도 짧죠. 그만큼 양념 맛이 아닌 명란 고유의 맛을 살리고자 최상의 품질을 사용하고 첨가물을 최소화하는 데 최선을 다하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일본 기술자와 교류하며 일본인의 입맛에 맞는 명란 제조법을 개발해 수출도 하셨어요. 일본의 까다로운 요구에 맞춰 좋은 제품을 만들었고, 마침내 명란의 맛과 품질을 인정받아 2009년 일본 세븐일레븐의 자체 브랜드 상품 납품 업체로 선정되면서 날개 돋친 듯 팔렸죠. 당시 세븐일레븐은 일본 전역에 편의점은 물론 대형 마트와 백화점 등을 거느린 유통 공룡 같은 존재였어요. 명란을 만드는 과정에서 필요한 컨베이어 벨트도 아버지께서 직접 맞춤형으로 설계하셨어요. 그 기계는 일본에도 없고 다른 어느 나라에도 없어요.
2006년 11월 11일에 덕화푸드의 자가 공장이 설립됐어요. 제가 볼 땐 아버지께서 당시 덕화푸드의 다음 스텝을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즈음에 1,000만 달러 수출을 달성했지만 일본 수출을 믿고 나아가기에는 리스크가 있지 않을까, 국내시장을 조금씩 개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자가 공장을 처음으로 설립하셨거든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명란 단일 제조 공장은 사실 당시에도 지금도 유일무이할 거예요. 당시 같이 열심히 일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래도 아들이 낫지 않나 싶어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해요.
2006년 11월 덕화푸드 공장이 완성되고 들어와 둘러보니 명란 제품에 이름이 없는 거예요. 수출 중심으로 운영하다 보니 국내에서 판매하는 제품은 선물용 목상자 제품군을 중심으로 1~2종류뿐인 데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제품 이름을 지으며 소위 브랜딩을 시작하게 됐죠.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제품마다 어떤 차별성을 두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했고요. 이후 패키지 디자인을 변경하고,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회사 이름도 ‘덕화유통’에서 ‘덕화푸드’로 바꿔나가는 작업을 해갔어요. 그렇게 브랜딩을 해나가며 처음 만든 제품이 ‘청주로 빚어낸 저염명란’이었고요. 저염과 청주로 차별화를 시도한 제품이죠.
먼저, 배에서 명태를 잡아 채취한 알을 1시간 이내에 급속 냉동해 감천항으로 싣고 와요. 그중 약 상위 10% 품질의 명란만을 제조 공장에 들여와 해동 후 양념장과 함께 골고루 섞어 재우는 1차 염지 과정을 거쳐요. 1차 염지를 마친 명란은 옅은 살굿빛을 띠는데, 이처럼 원물에 소금 간이 적절하게 스며든 상태의 제품이 바로 ‘백명란’입니다. 이후 첨가하는 재료에 따라 ‘숙성고 명란’, ‘그때 그대로 명란 등 다양한 맛과 모습의 제품으로 탄생합니다.
한국식 명란의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명란이자 전통 방식으로 발효시킨 한반도 원조 명란이 바로 ‘조선명란’이에요. 특히 통쾌한 짠맛이 두드러지는 명란이죠. ‘백명란’은 한국식 저염 명란 중 하나로 고춧가루를 넣지 않아 맛이 깔끔하고 짜지 않아 참기름과 궁합이 잘 맞아요. ‘숙성고 명란’도 한국식 저염 명란 중 하나인데, 김치처럼 고춧가루 양념을 묻혀 만들어요. 맛있게 매콤한 맛이 나죠. 마지막으로 ‘그때 그대로 명란’은 가장 부드럽고 순한 맛이 나는 일본식 저염 명란으로 멘타이코 제법으로 만들어요. 백명란을 가쓰오부시 국물과 청주, 맛술에 3일간 재우면 부드럽고 달콤한 맛의 명란으로 완성되는데, 감칠맛이 아주 좋습니다.
여사님들을 포함해 우리나라 여성 노동자의 실력은 전 세계를 아울러 굉장히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특히 손기술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나요. 섬세한 손기술에 따뜻한 품성과 성실한 태도까지 더해지니, 생산력이 월등할 수밖에 없는거죠. 일정한 무게에 맞춰 계량하는 작업에 이어서 명란을 다듬는 단계는 특히 손재주가 있어야 하는 작업이거든요. 명란은 물성 자체가 매우 섬세하고 예민해 여사님들이 하나하나 손으로 작업을 합니다. 일본은 칼로 작업하는 반면, 덕화푸드 여사님들은 가위로 해요. 칼과 가위는 한 끗 차이 같지만 그 결과물의 모양과 품질은 차이가 크거든요. 일본 사람들이 가위로 자르며 손으로 다듬는 우리의 가공 기술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해요. 평균 15년 이상 근속한 여사님들은 아버님과 오랜 친분을 쌓아온 숙련된 분들이에요. 제일 오래 일한 반장님은 20년 정도 함께했죠.
우리나라는 명란 종주국이에요. 명란이라는 음식에는 아픔이 서려 있어요. 전쟁과 분단, 무분별한 남획으로 명태 어장을 잃어버리는 사이 명란이 일본으로 넘어가며 대중화되었죠. 명란 역사의 맥을 이어 현대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그 단서는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의 전통 음식이 어느 순간 맥이 끊긴 채 일본 음식으로 알려진 점도 매우 안타까웠고요. 명란젓에 관한 최초의 국내 문헌 기록은 1652년 〈승정원일기〉에 있는데, “강원도에서 궁궐에 올릴 진상품으로 대구알젓이 아닌 명태알을 보내 일이 혼란스럽다”라는 대목이 등장해요. 이미 조선에서 명란이 식재료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말인 거죠. 일본에서는 19세기후반에 들어서야 문헌에 명태나 명란이 등장하고요.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명란의 역사나 문화와 관련한 변변한 책이나 기록물이 없지 않습니까? 2010년 일본에 갔을 때 〈명태자개발사〉라는 책을 보게 됐어요. ‘일본에서의 명란 발전사’와 같은 뜻인데, 번역해 읽어보곤 부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그 책에도 명란의 시작은 조선이라고 언급되어 있었죠. 우리도 전통 식품인 명란의 역사와 문화를 정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들었고, 명란 제품을 만드는 데 우리나라의 명란 역사와 제조법을 아는 것이 기본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산은 세계적으로 명란 산업의 중심지이자 역사가 아주 깊은 지역이에요.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기수역 지역으로 부산항은 원산 앞바다를 비롯해 전국의 명태잡이 배들이 모여들었고, 잡아온 명태와 명란이 수도권이나 내륙지방으로 가기 위해 환적되는 물류적으로 매우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명란이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 사람들에게도 동시에 사랑받았는데, 부산은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그야말로 첫 번째 관문이자 명란과 관련한 수많은 회사와 자본이 모여 있던 곳이었습니다. 현대에 들어서 부산의 역할은 더욱더 중요해지고 있어요. 1980년대 중반 이후 남북 간 경쟁적인 남획으로 동해의 명태 어장이 붕괴한 이후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명태가 공식적으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세계 최대 명태 어장인 러시아 오호츠크해에서 잡은 명태가 이 시기부터 배에 그대로 실려 부산 감천항으로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부산이 냉동 창고, 물류 운송, 비즈니스 신뢰도 등 국제 교역에 필요한 인프라를 잘 갖췄기 때문이에요. 더불어 명란 원료의 최대 구매국인 일본을 견제하고 싶은 러시아로서는 부산이 중간자적 위치에 있던 거죠. 매년 3~5월이면 일본의 명란 생산자들과 무역 회사들이 검품을 하기 위해 부산을 찾습니다. 러시아 선사는 물론 미국 선사 관계자들까지 부산에 집결하고, 이때 다양한 비즈니스적 거래와 기술 교류가 이뤄지죠.
명란이 우리나라의 전통성을 지닌 음식이라는 사실을 더 많은 사람이 알면 좋겠어요. 명란은 우리에게 오랜 친구와 같은 존재예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연어가 있듯이 우리에게는 명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명태, 명란을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이 제 바람이에요. 일제강점기, 전쟁과 분단이라는 아픔 속에서 채 이어지지 못한 음식 문화로 명란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메시지를 건네기도 하고요. 덕화푸드는 이런 명란의 역사와 전통을 알리고, 그 속에서 부산이라는 지역성을 살릴 수 있는 제품과 콘텐츠를 만들어가고 싶어요.
앞으로 10년 뒤에는 덕화푸드가 맛과 기술력 측면에서 세계 최고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명란을 만드는 기업으로요. 또 하나는, 우리나라 명란 또한 앞으로 맛과 형태가 발전해나가면서 그 모습이 꽤 다양해질 거라고 봐요. 전통적인 맛과 레시피를 그대로 지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고, 글로벌 시대에 맞춰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나갈 수도 있고요. 어떤 식으로 하든 11년 뒤에는 우리나라 명란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져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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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사랑 받고 있는 덕화푸드 제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