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화 그리고 수묵 추상 TK is the New Black (3)|임근준

한국 현대미술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평론가, 서울 태생, 경계성 아스퍼거 증후군, 커밍아웃한 바이섹슈얼인 임근준(이정우)이 경계 밖의 시선으로 대구·경북 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합니다. 대구·경북의 미술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전제로, 객관적인 동시에 편파적으로.

서화 그리고 수묵 추상 TK is the New Black (3)|임근준

서화 그리고 수묵 추상 TK is the New Black (3)|임근준

한국 현대미술을 오랜 시간 관찰해온 평론가, 서울 태생, 경계성 아스퍼거 증후군, 커밍아웃한 바이섹슈얼인 임근준(이정우)이 경계 밖의 시선으로 대구·경북 미술의 어제와 오늘을 조망합니다. 대구·경북의 미술을 향한 특별한 애정을 전제로, 객관적인 동시에 편파적으로.

1910년대: 너무나 낯선 이국 같은 우리 근대 서화의 시작

대구·경북 지역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당당하게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근대 서화 운동의 전통과 이를 바탕으로 한 추상 미술 운동의 역사다. 그렇기에 오늘날 한국화가 처한 위기 상황에 비춰보면, 선대의 개척자들과 그들이 일군 가치가 다소간 잊히고 있는 현실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일본 식민지 시대의 흐름은 편향적으로 조명되어온 측면이 있다. 그렇기에 평안남도 중화 태생의 해강 김규진과 그가 이끌던 서화연구회의 흐름, 그리고 호남의 새로운 남종화 탐구 경향, 즉 조선 후기의 화가 소치 허련의 화풍을 계승했다고 알려진 의재 허백련과 남농 허건의 운림산방 화계畵界 등은 상대적으로 깊이 있게 논의하는 일이 드물다. 아무래도 역사의 주도권이 서화협회의 인맥을 중심으로 형성됐기 때문에 그런 편향이 생기고 말았다.

평안도 태생의 서화가 수암 김유탁이 1906년 최초의 상업 화랑으로 일컫는 수암서화관을 연 일이나 황해도 해주 태생의 애국지사 오세창이 역대 서화가를 조사·정리하고 옛 글씨와 그림을 수집·연구해 그 성과를 1917년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의 초본으로 정리한 일들이 지닌 역사적 의의 등을 이야기하면 한국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듯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낯선 이국으로 남아 있다.

* 이후 1928년 계명구락부에서 출간한 <근역서화징>은 근대 이전의 서화가 1,117명의 기록과 해제를 담고 있다. 오세창은 간송 전형필이 소장선을 구축하고, 1937년 보화각(간송미술관)을 설립할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기도 한 인물. 이 수집·감식가 시대의 역작은 이후 정식 미술사학자들이 활동하는 데 발판 역할을 한다.

한국화를 전공하는 학생들조차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다.

이렇듯 우리의 과거는 너무나 낯선 이국으로 남아 있다.

1920년대: 전통 서화를 현대화하다

서울의 개화기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던 1915년 김규진은 서화미술회와 대비되는 서화연구회를 설립했다. 당시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는 서화가는 소수에 불과했는데, 그는 평안도 모더니스트답게 여성도 수강생으로 받아들였다. 서양화·동양화 등의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 역시 1915년으로,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리면서부터다. 이때 경복궁에 조선총독부미술관*도 개관했다.

* 해방 이후 경복궁미술관으로 개칭해 국전을 주최했고, 이로부터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도 출범했다.

석재 서병오

석재 서병오, ‘난초와 괴석’, 연도 미상

1921년 서화협회가 처음으로 협회전을 열 때, 최초의 미술 전문지 <서화협회보>도 창간됐다. 그런데 바로 이듬해인 1922년 서병오 등이 대구에서 교남시서화연구회를 조직한다. 조선총독부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열리기 직전이었다. 이규채와 김권수가 서울 공평동에서 최초의 여성 서화 교육기관인 창신서화연구회(규수서화연구회)를 설립한 것도 1922년이었다. 이상범·노수현·이용우·변관식이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고 전통화의 현대화를 추구하기 시작하는 것은 1923년이었으니, 이 시기는 현대적 서화 운동의 결정적 발흥기인 셈이다.

*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화 동인회.

이렇게 서화 전통의 현대화를 추진하는 다종다양한 흐름은 서양화를 조선화·토착화하는 움직임으로 이어진다. 1928년 박광진·김주경·심영섭·장석표 등은 서양 현대미술의 토착화를 주장하며 녹향회綠鄕會*를 설립했다. 이 시기 칸딘스키가 동양 정신으로 회귀하고 있다고 본 심영섭의 ‘아세아주의 미술론’이 큰 반향을 일으켰는데, 이는 서양 현대미술로 서화의 정신세계를 계승·일신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29년, 대구의 한학자 집안에서 훗날 수묵 추상 운동을 전개하는 서세옥이 태어난다. 역사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가끔은 신의 손길이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한 박광진·김주경, 서울에서 독학한 심영섭·장석표가 발기 회원으로 참여한 미술 단체. 최초의 본격적 양화가 그룹으로 평가받는다.

1929년, 대구의 한학자 집안에서 훗날 수묵 추상 운동을 전개하는 서세옥이 태어난다.

역사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가끔은 신의 손길이 함께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 식민기에 이미 서울화단 이외에도 영남화단, 평양화단, 호남화단이 저마다 세를 형성하며 활성화됐다(어찌 보면 요즘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영남화단은 대원군 이하응을 통해 추사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서병오·김진만·배효원·서동균이 이끌었다. 영남의 양반 문화 덕분에 이들은 서예와 사군자를 중심으로 정신성의 계보를 일궜다. 비양반 출신이나 개화 중인은 포함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말이다.

1922년 1월 22일 석재 서병오가 주도해 설립한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서화전람회 개막과 더불어 강습소 설치와 운영, 강연회 주최와 도서관 설립 등을 목표로 제시했다. 본격적인 지역 미술 운동을 추구한 것. 교남시서화연구회는 1922년 5월 제1회 전람회를 개막했다.

<교남시서화회 100주년 기념 2022년 수묵의 확장 - 동아시아 특별전> 포스터

서병오는 시서화 모두에 능한 데다 거문고·바둑·장기·의술·구변에도 뛰어나 ‘팔능거사八能居士’라 불렸으며, 사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06년엔 대구의 자강 단체인 광문사 설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07년엔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 평의원으로서 국채보상운동 발기인이 되기도 했다. 1933년 화가 서동진이 제자 이인성을 위해 ‘천재 소년화가 이인성군 개인전**’을 열자고 할 때 힘을 보탠 대구 지역의 유지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서병오였다.

* 대구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 의연금을 모금했다.
** 서병오의 제자 서동균은 1931년 서동진·김용진·최화수·박명조·최유근·한성준과 함께 ‘향토회’를 설립해 향토주의 미술운동을 이끌었다. 그러하니 이인성이 향토색 미술로 성취를 이루고 1935년 선전에서 출품작 ‘경주의 산곡에서’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은 모두 앞 세대가 공들여 밭을 갈고 씨를 뿌린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병오와 서세옥, 김규진과 이응노… 그리고 여성

서병오는 김규진과 동년배로, 이들에게는 의외의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중국과 일본을 여행하고, 여러 서화가와 교유하며 국제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는 것. 중국의 서화가 오창석吳昌碩, 1844~1927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같았다. 대나무 그림을 보면 김규진의 작품은 호방하다 못해 숭고한 빛을 띠는데, 서병오의 작품은 호방하면서도 세련된 아취를 풍긴다. 서병오의 사군자는 대원군보다도 수준이 높아 신운神韻의 경지를 드러내지만, 그 흐름은 이후 잘 계승되지 못했다. 1862년생인 서병오는 1935년에, 1968년생인 김규진은 1933년에 세상을 뜨면서 이들의 유업遺業은 식민지 시대 후반에 이미 상당히 흐트러지고 말았다. 

대구에 서병오미술관이 없다는 점에 안타까워하는 이가 많지만, 그보다도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이 장기 연구를 바탕으로 서병오 회고전과 김규진 회고전을 먼저 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다행인 점은 2017년 대구미술관이 <대구미술을 열다: 석재 서병오>전을 개최하고 학술 대회 ‘석재 서병오의 생애와 예술’을 병행함으로써 기본적인 연구의 발판을 마련한 상태라는 사실. 이제 대구라는 틀 바깥에서 그와 그의 유산을 재조명할 차례다.

전후의 수묵 추상 운동에서 여성에게 주도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영남 사대부 전통을 비판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없었던 탓이다.

한데 서병오가 대구·경북 지역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됐다는 점, 특히 그가 한시에 능했다는 점은 다음 세대에겐 넘기 어려운 벽이 된 느낌도 있다. 시서화에 모두 능한 사대부적 면모란 현대사회에서 이룩할 수도 없고, 또 굳이 이룩할 이유도 없으니까. 전후의 수묵 추상 운동에서 여성에게 주도권을 허락하지 않은 것은 영남 사대부 전통을 비판적으로 승화하는 과정이 없었던 탓이다.

보다 현대적 예술가상에 가까웠던 김규진에게서 이응노라는 위대한 현대예술가가 배출된 것을 생각해봐도 둘의 후계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서병오의 제자 가운데 김진만과 서동균이 뚜렷한 족적을 남겼지만, 서화 세계의 현대적 창신創新이라는 면에서는 아쉬움을 남겼다. 서병오의 정신적 제자로는 산정 서세옥을 꼽을 수도 있겠다.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가 교남시서학회 100주년을 맞은 2022년에 서세옥에게 석재문화상을 시상한 것 역시 이 때문이 아닐까.

서세옥, ‘사람들’, 1988, 종이에 먹, 187x18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서세옥이 주도한 묵림회는 중앙공보관에서 창립전을 열었다. 묵림회는 기성 동양화단의 고루함과 대전의 폐단,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 사이의 대립에서 나타나는 화단의 파당성을 비판하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수묵(반)추상운동* 전개했다. 묵림회원들의 창작 활동 외에도 서세옥이 1962년 장우성과 노수현을 친일 축첩자蓄妾者, 첩을 두고 사는 사람 몰아 교단에서 축출하고 스스로 서울대 교수가 되었을 때, 이 시기가 서화 전통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1965년 묵림회가 해체된 이후 그 또한 화단과 대학의 권력자로 군림하면서, 서세옥이 남긴 수묵 추상의 성취는 다시 아래 세대에겐 억압과 장벽이 되고 말았다.

* 묵림회는 대체로 완전 추상이 아닌 반추상을 남겼다. 묵림회원전에는 반추상을, 국전엔 추상을 출품했다.

새로운 수묵 추상: 한시를 넘어 현대시로, 비양반 계층과 여성에게로

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분명하다. 수묵 추상의 낡은 권위를 딛고 새로운 창신의 길을 여는 것. 2020년대의 새로운 현대 서화는 서병오의 교남시서화연구회나 김규진의 서화연구회 등과의 연결 고리를 회복하고 더 과감하게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 한시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버리고, 전 지구적 현대시의 흐름과 결합하는 서화의 세계를 구축할 생각을 해야 한다. 또한 여성 서화가를 재발견하고, 비양반 계층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귀족 흉내를 내는 늙은 도련님끼리의 세계는 20세기 후반에 서둘러 타파하고 깨끗이 청산했어야 했다.

학고재갤러리에서 먹의 수조를 제작 중인 작가 김호득의 모습(2019)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숯-조각 작업을 설치 중인 작가 이배의 모습(2021)

김혜련, ‘곳(정음 27)’, 2021, 모직에 먹, 120x150cm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영남인에게만 문호를 여는 단체가 아니었다고들 말한다.

21세기엔 그 유산을 바탕으로 더 커다란 환대와 포용의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석재서병오기념사업회의 가치 기준이 다소 좁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대부적 서화 전통을 정면으로 맞서며 전통적 가치를 보다 현대적 차원에서 탐구해온 김호득(1950~), 이배(1956~), 김혜련(1964~) 등을 포괄할 수 있어야 옳지 않을까?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남성 중심적 서화 전통의 수정을 시도해온 김화현(1978~)까지도 환영할 수 있는 틀을 짜야 대구에서 세계로 나아가는 연결망을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교남시서화연구회는 영남인에게만 문호를 여는 단체가 아니었다고들 말한다. 대구 내 단체를 중심으로 전국의 서화가들이 교유했다니, 21세기엔 그 유산을 바탕으로 더 커다란 환대와 포용의 그림을 그릴 수 있으리라 믿는다.

김화현, ‘군선도(群仙圖)’ 중 가운데 제1폭, 2017, 순지에 수묵 담채, 100호 크기의 5폭으로 구성

Illustration | 대구에 모인 세 명의 예술가. 김호득과 고(故) 서세옥은 대구, 이배는 청도 출생이다. 인물들 뒤로는 각자의 작품이 펼쳐졌다.

*사진 제공: 임근준

**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임근준

당대 미술이 붕괴-해체되는 오늘 집요한 역사 연구를 기반으로 한국과 아시아의 미술사를 쓴다. 서울대학교에서 디자인과 미술을 공부하고 큐레이터와 편집장, LGBTQ 운동가로 일했다. 한편 그의 인스타그램 @crazyseoul 은 매일 그가 살피는 인간군상의 샬레다. 이 프로필을 작성하는 2022년 10월 28일 자 포스팅은 예수상, 근비대 아이돌, 푸우 닮은 시진핑 짤, 피에르 술라주의 부고 등.

  • 서화 그리고 수묵 추상
    TK is the New Black (3)|임근준
  • EditMijin Yoo IllustrationTatsuro Kiu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