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과 합리의 도시 대구 아키텍처 (3) | 황두진

건축가이자 건축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저술가인 황두진 소장이 대구의 노란 도시 철도에 몸을 싣고 네 편의 글을 전합니다. 지형적 유산과 이름의 연원, 근대건축,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낸 시스템까지 정온하고도 합리적인 이 도시를 두루 돌아볼 요량입니다.

정온과 합리의 도시 대구 아키텍처 (3) | 황두진

정온과 합리의 도시 대구 아키텍처 (3) | 황두진

건축가이자 건축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저술가인 황두진 소장이 대구의 노란 도시 철도에 몸을 싣고 네 편의 글을 전합니다. 지형적 유산과 이름의 연원, 근대건축, 오늘의 모습을 만들어낸 시스템까지 정온하고도 합리적인 이 도시를 두루 돌아볼 요량입니다.

“대구예? 깔끔하지예!”

KTX를 타고 마침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대구역에서 내려 택시를 탔다. 낯선 도시에 대한 느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택시 기사님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이다. “길거리가 유난히 깨끗한 것 같다”라고 하자 바로 날아온 대답이다. 덧붙여서 자신은 외지에서 이사 온 입장인데 대구만큼 잘 정돈되고 깨끗한 곳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일과 답사로 전국의 여러 도시를 다니는 입장이지만, 나 역시 생각이 비슷했다. 단순히 청소가 잘되어 있다는 의미를 넘어 도시 자체가 착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정온한 느낌을 주는 도시를 하나 뽑으라면 아마도 대구일 것이다. 서울과 부산이 종종 온갖 종류의 미학이 난해하게 공존하는 곳이라면 대구는 그중 몇 가지만 골라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새로 지은 건물들은 크든 작든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정하고 차분하며, 대체로 건축 조형이 과하지 않다. 혼종과 대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무렵부터 대구는 아늑하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많기로 유명했는데, 그 명성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동성로 같은 구도심 일대는 물론이고 대봉동이나 수성동 일대의 골목마다 단정히 차려입고 길을 나선 사람과 비슷한 분위기의 작은 카페와 식당이 여기저기에 숨어 있다.

대구의 건물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정하고 차분하며, 대체로 건축 조형이 과하지 않다.

혼종과 대비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표면의 심심함과 이면의 합리

동전의 양면이랄까. 대구는 건축과 도시 전문가 사이에서 도시의 규모나 지명도에 비해 흥미로운 현대건축이 그다지 많지 않은 곳으로 꼽히기도 한다. 사실 대구를 대표하는 랜드마크 건축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마땅한 대상이 그리 쉽게 생각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대구는 대전과 더불어 전국에서 가장 ‘노잼 도시’(!)라는 불명예스러운 반열에 종종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표면적 심심함의 이면에 철저한 합리성이 버티고 있는 도시가 바로 대구다. 도시 구조를 파악하기가 쉬운 데다 외지인이 이동하기에도 어렵지 않다. 일단 기차역만 해도 위에서 이야기한 서대구역을 필두로 하여 차례로 대구역, 동대구역이 있다. 그냥 들으면 바로 이해되는 이름의 기차역들이 정확히 그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구도심의 주요 도로명도 같은 원리를 따른다. 20세기 초반 대구 읍성이 철거된 후 그 자리를 따라 새로운 도로가 들어섰는데, 이름하여 동성로·남성로·서성로·북성로다. 당시 누군가는 심오한 의미가 담긴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구의 선택은 그냥 동서남북, 허탈할 정도로 단순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친절한 명쾌함 그리고 엄청난 공공적 편리함이다.

누군가는 심오한 의미를 담은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구의 선택은 그냥 동서남북,

허탈할 정도로 단순했다.

대구의 이러한 합리성이 돋보이는 또 다른 예는 이용객 수 전국 2위인 동대구역이다. 두 가지 점에서 동대구역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다른 기차역과 다르다. 우선 동대구역은 지상역, 그러니까 철로가 지상에 위치하고 그 위에 역사를 세운 구조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그런데 역에서 밖으로 나오면 단차 없이 그냥 도시와 수평으로 만난다. 지상으로 나가기 위해 대합실에서 계단을 한참 내려가야 하는 서울역이나 부산역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동대구 역사의 동서쪽 전면이 멀리서부터 경사로로 조성된 도로 겸 광장이기 때문이다. 이름도 동대구역고가교, 동대구역동고가교다. 자동차가 단차를 극복하도록 설계한 덕분에 보행자는 편하기 짝이 없다. 단면으로만 보면 도쿄의 우에노역이나 이를 참고한 만주의 다롄역과 유사하지만, 동대구역의 경우가 훨씬 더 도시적이며 적극적인 해법이다. 덕분에 보행자 입장에서 바라본 동대구역은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동대구역에서 밖으로 나오면
단차 없이 그냥 도시와 수평으로 만난다.

자동차가 단차를 극복하도록 설계한 덕분에
보행자는 편하기 짝이 없다.

동대구역이 지닌 또 다른 특성은 역사의 방향이다. 통상 기차역은 철로와 직각 방향으로 출구가 나 있다. 철로로 인해 단절된 도시의 양쪽을 역사가 연결하는 구조다. 그래서 우리는 대합실에서 열차 진행 방향과 직각으로 발걸음을 돌려 양옆으로 역사를 빠져나가는 것에 익숙하다. 동대구역은 조금 다르다. 플랫폼에서 한 층 위로 올라오면 대합실인데, 앞뒤 출구가 철로와 같은 방향이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그냥 수평 이동해 역사를 빠져나간 후 동서쪽 역 광장에서 원하는 방향으로 도시를 향해 이동하면 된다. 동대구역에서의 보행자 동선은 기차의 동선과 같은 방향이다. 처음에는 조금 혼동되지만, 익숙해지면 정말 편리해 왜 다른 역들은 이렇게 만들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될 정도다. 아마도 동대구역을 이런 구조로 완성하기까지는 수많은 회의와 토론을 거쳤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을 터다. 최종 결정이 어떻게 내려졌는지는 모르지만, 그 과정에 참여한 이들은 동대구역을 이용하는 수많은 시민에게 실로 어마어마한 선물을 준 셈이다. 얼마 전에는 역사와 인접해 종합버스터미널까지 새로 들어섰는데, 대구 규모의 도시에서 이 정도로 대중교통 연계성이 좋은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서울역과 부산역의 경우 고속버스를 타려면 도시를 한참 가로질러야 하지 않나. 정온과 합리의 도시, 대구가 거듭 돋보이는 대목도 이 부분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대구를 넘어 대한민국의 도시적 보편성이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Illustration | 차도가 멀리서부터 완만한 경사로 높아져 보행자 입구와 같은 높이로 만나게 되는 동대구역 입구. 승객들이 긴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바로 도시와 만나게 된다. 황두진 소장이 보내온 사진을 바탕으로 작화했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황두진

황두진은 건축가이자 건축을 매개로 역사와 사회를 기록하는 저술가다. 서울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2000년 자신의 사무실을 시작했다. 서울 구도심에서 출발해 작품과 강의, 전시를 통해 한국과 해외로 활동 범위를 넓혀왔다. 서울시건축상, 건축역사학회작품상 등을 수상했고, 대표작으로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원앤원 63.5, 춘원당 한방병원 및 박물관, 스웨덴 동아시아박물관한국관을 비롯해 일련의 한옥 작업 등이 있다. <무지개떡 건축>,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등 7권의 저서에서 그의 시야를 찬찬히 살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