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 굽는 고을 대구 밥상 (4) | 박정배

탄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구성진 음식 이야기로 오랜 시간 독자와 만나온 칼럼니스트 박정배가 대구를 찾았습니다. 치킨과 분식, 붉은 국물과 내장까지 네 편의 연재로 대구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봅니다. 잠시 숨을 고르세요. 읽는 것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지 모르니까요.

내장 굽는 고을 대구 밥상 (4) | 박정배

내장 굽는 고을 대구 밥상 (4) | 박정배

탄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구성진 음식 이야기로 오랜 시간 독자와 만나온 칼럼니스트 박정배가 대구를 찾았습니다. 치킨과 분식, 붉은 국물과 내장까지 네 편의 연재로 대구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봅니다. 잠시 숨을 고르세요. 읽는 것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지 모르니까요.

대구는 내장의 도시다. 육개장, 돼지국밥 같은 국물 요리에서 통닭, 닭똥집에 소 막창, 돼지 막창 구이까지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한 도시다. 대구는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경상도 물산의 중심지였다. 서문시장은 조선 시대부터 전국 3대 재래시장으로 꼽혔다. 일제강점기부터 경상도, 전라도를 포함한 3남 지방(충청남북도·전라남북도·경상남북도)의 소를 비롯해 “서울·부산 등 전국 주요 도시는 물론 멀리 서북 황해도·만주 등지에까지 공급하는 집산지로서 성시를 이루었으며 장날이면 하루 거래 두수가 500두를 넘었고, 당시에는 소뿐 아니라 제주도에서 오는 말까지 모두 이곳에서 거래가 이루어졌다”(1969년 11월 8일 자 <매일경제>)고 한다.

대구는 내장의 도시다.

육개장, 돼지국밥 같은 국물 요리에서

통닭, 닭똥집에 소 막창, 돼지 막창 구이까지
고기 굽는 냄새가 가득한 도시다.

가난하고 젊은 노동자를 먹여 살렸던 내장

전쟁 이후 침체기를 맞은 후 1960년대 대구는 또 한번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대구·경북 지역의 핵심 공업 및 소비 도시 역할을 수행하면서 주변 인구를 흡수하고 섬유산업 등 경공업 중심지가 되어 대구가 소비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 여기 더해 이전부터 있던 우시장 덕에 육고기 문화가 꽃을 피운다. “장날이면 하루 400여 두로 연간 거래 두수는 3~4만 두로 추산, 거래액이 20억 원이나 되는 국내 최대의 牛시장”(1969년 11월 8일 자 <매일경제>)이란 기사처럼 한때 대구는 전국 소의 23%가 거래되는 시장이었다. 산업화를 겪으며 대구로 몰려든 젊은 공단 근로자들에게 단백질은 필수품이었다. 돈 있는 사람은 정육을, 가난하고 젊은 노동자들은 내장을 소비했다.

대구로 몰려든 젊은 공단 근로자들에게 단백질은 필수품이었다.

돈 있는 사람은 정육을, 가난하고 젊은 노동자들은 내장을 소비했다.

1960년대 초반 일본의 호르몬ホルモン. 소·돼지 등의 내장을 이르는 일본어 구이 문화가 부산을 거쳐 대구로 유입됐고, 1963년에 절정을 이룬 콜레라 역시 구이 음식이 사랑받는 계기가 된다. 1963년 9월 24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시민들은 소주와 마늘이 좋다는 ‘전설’ 때문인지 어제 23일 밤의 시내 곱창집들은 손님 흥성으로 즐거운 비명을 올리고 있었다.” 전염병이 냉면 같은 국물 음식 대신 구워 먹는 음식 문화가 번성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대구의 본격적인 내장 구이 문화는 “1969년 4월 현재 성당못 옆 두류수영장 자리에서 도축 전문법인 ‘신흥산업’이 오픈한 뒤 1970년 시립도축장으로 발돋움하면서 열린다. 도축장은 1981년 중리동 현재 퀸스로드 자리에 있다가 2004년 북구 검단동 유통단지 내로 이전”(2015년 11월 24일 자, “막곱창 1번지 대구”, <영남일보>)한다. 1970년대 초 일명 ‘합승도로변’에서 ‘황금막창’이 최초로 소 막창 요리를 선보인다. 

곱창, 소창, 막창··· 대구가 내장을 부르는 법

대구에서 내장을 일컫는 명칭은 타 지방과 조금 다르다. 곱창이란 이름은 소가 아닌 돼지의 소창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안지랑곱창골목의 곱창도 돼지 소창이다. 막창이란 말도 오해를 부른다. 돼지 막창은 모두 말 그대로 ‘마지막 창자’인 막창을 재료로 사용하지만, 소 막창의 경우 네 번째 위인 홍창을 주로 사용한다. 

한편 대구에는 소 곱창, 대창 문화가 별로 없다. 대부분 부산의 낙곱새 문화가 번성하며 부산이나 서울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작지만 생곱창 그대로 얼큰하게 끓여 먹는 곱창 전골의 ‘버들식당’이 50년 넘게 전통을 자랑하고 있고, 최근의 구이 문화를 반영하듯 곱창을 쪄서 구워 먹는 문화의 선두 주자인 ‘양곱화’도 성업 중이지만 말이다. 그 대신 대구의 소 내장 문화는 막창 문화가 주를 이룬다. 황금막창의 성공 이후 1987년 범어시장에 문을 열어 삶지 않은 소 막창 구이 시대를 연 ‘동봉막창’, ‘경남막창’이 연탄불에 구워 먹는 소 막창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대구의 소 대창 문화는 타 지역과 달리 속을 갈라 기름을 제거하고 납작한 형태로 구워 먹는다.

대구의 소 대창 문화는 타 지역과 달리

속을 갈라 기름을 제거하고 납작한 형태로 구워 먹는다.

대구의 불야성을 만드는 돼지 막창과 돼지 곱창

현재 대구의 내장은 돼지 막창과 돼지 곱창이 주도하고 있다. 대명동 안지랑양념곱창골목은 대구 앞산 밑으로 수십여 개의 곱창집이 장관을 만드는 곳. 밤이면 곱창 냄새와 가게의 불빛들이 불야성을 이룬다. 안지랑양념곱창골목의 원조는 1979년 ‘충북식당’으로 출발한 ‘충북막창’이다. 삶은 곱창에 마늘·고춧가루 등 갖은양념을 넣어 연탄불에 구워 내면서 인기를 얻었다. 지금 이곳의 가게들은 곱창을 직접 삶지 않고 서구 이현동 내 이현공단에서 한마당 식품, 3공단 내 송강식품 두 곳에서 삶은 것을 받아 사용한다.

‘달구지막창’은 1999년 IMF 직후 대한민국의 힘든 경제 상황 속에서 막창 대중화를 이끌었다. 1993년 ‘대동막창’으로 시작한 후 1999년에는 150개의 체인점을 둘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후 작은 혁신이 이어졌다. ‘대구반야월막창’은 초벌 막창 시대를 열었고 소시지 등을 곁들인 ‘우야지막창’, 수정불판으로 유명한 ‘부자막창’, 2004년 북구에서 등장한 ‘참우양곱창’은 소양과 대창 등을 곁들인 ‘소양·막곱창 모둠 세트’를 내놓아 선풍을 일으켰다. 스페인산 돼지의 깔끔한 기름 맛으로 유명한 ‘막창도둑’ 등 돼지막창 체인점은 대구를 넘어 해외로까지 진출하고 있다.

현재 대구의 내장은

돼지 막창과 곱창 돼지 곱창이 주도하고 있다.

이런 체인점 외에도 대구호텔 근처 ‘삼일막창’, 황금네거리 근처 ‘제일막창’, 두산동 ‘아리조나막창’, 성서 ‘부원막창’, 청구네거리 ‘대구막창’, 북구 산격동 ‘딱조아막창’, 두산동 ‘마루’ 등 개별 가게들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며 영업 중이다. 칼국숫집 수육으로 암퇘지에게서만 나오는 쫄깃한 식감의 아기보가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조선 최대의 우시장, 산업화, 근대화, IMF 같은 시대의 격랑과 괘를 같이한 대구의 내장 문화는 국내 최고의 내장 외식 문화를 만들어냈다. 이런 외식업의 발달이 저렴한 서민의 내장 문화를 세련되게 만들어냈다. ‘K-내장’이란 단어가 나올 날도 멀지 않았다. 기원은 대구가 유력하다.

Illustration | 맛있게 구워진 내장 한 점으로 고단한 하루를 달래는 안지랑곱창거리의 풍경. 샐러리맨의 얼굴은 박정배 필자를 모델로 했다.

**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정배

한·중·일 음식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고 현장을 탐사한다. 글 전체에 거세게 몰아치는 사료는 읽는 이를 식문화사의 생생한 한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조선일보>에 ‘박정배의 한식의 탄생’, ‘결정적 메뉴’ 등을 연재했으며, 넷플릭스 <한우랩소디>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 자문 역할을 하거나 직접 출연하곤 한다. ‘국물아카데미’, ‘국수학교’ 등 음식 관련 강의 아카데미도 운영 중이다. 저서로 <만두, 한중일 만두와 교자의 문화사>와 <음식강산> 등이 있다.

  • 내장 굽는 고을
    대구 밥상 (4) | 박정배
  • EditMijin Yoo PhotographJeongbae Park IllustrationTatsuro Kiuc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