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눈 전가경 사라지지 않고, 흐려지지 않는 사진책의 기록

4월에 내리는 눈은 고요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다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느새 사라진다. 찰나의 순간, 요란하지 않게 반짝하고 빛나던 풍경은 어떤 이의 기억에선 영원히 잊히지 않는 순간이 된다. 출판사 ‘사월의눈’은 그 풍경을 닮은 듯 닮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미처 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묵묵히 수집한다.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4월의 눈과 달리, 사월의눈 사진책엔 영원히 녹지 않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

사월의 눈 전가경 사라지지 않고, 흐려지지 않는 사진책의 기록

사월의 눈 전가경 사라지지 않고, 흐려지지 않는 사진책의 기록

4월에 내리는 눈은 고요하다.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다 이렇다 할 흔적도 남기지 않고 어느새 사라진다. 찰나의 순간, 요란하지 않게 반짝하고 빛나던 풍경은 어떤 이의 기억에선 영원히 잊히지 않는 순간이 된다. 출판사 ‘사월의눈’은 그 풍경을 닮은 듯 닮지 않았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미처 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묵묵히 수집한다. 반짝 빛나고 사라지는 4월의 눈과 달리, 사월의눈 사진책엔 영원히 녹지 않는 순간들이 담겨 있다.

‘사월의눈’이라는 출판사명을 듣자마자 뭔가 감성적이면서도 조금은 쓸쓸한 풍경이 떠올랐어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2012년에 출판사 이름을 뭘로 할지 한창 고민할 때였어요. 서울에 거주하던 시절이었는데, 아파트 창밖으로 눈발이 휘날리더라고요. 그때가 4월 3일이었어요. 기묘한 풍경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딱 ‘사월의눈’이라는 단어가 생각나면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사진책 출판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4월에 내리는 눈은 결국 생태계와 기후 위기가 모두 연관된 디스토피아적인 현상이잖아요. ‘사진책을 출판한다 한들 과연 미래가 있을까?’ 하는 우려와 출판계의 열악한 상황 등 모든 감정이 그 쓸쓸한 풍경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어요.

수익성을 고려하면 ‘사진책’을 전문으로 하는 출판사를 차리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듯해요.

어떻게 보면 무지했기에 무모하게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사진책을 출판하고자 하는 열망은 오래전부터 품어왔지만, 선뜻 시도하지 못했죠. 마침 남편이자 디자이너인 정재완 씨가 영남대학교로 부임하면서 기회가 왔어요. 이전보다 경제적 기반이 갖춰지니, 상대적으로 저는 수익에 연연하지 않아도 괜찮은 일을 할 수 있게 된 거죠.

연고가 없던 대구에 정착하면서 사월의눈의 대표로서 혹은 개인으로서 느끼는 변화가 있었나요?

유년 시절 유럽에서 10년 정도 보냈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녀서 다른 도시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어요. 저에게 대구는 그저 베일에 싸인 곳이었죠. 대구에 처음 왔을 때 어린 시절 지내던 유럽의 소도시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시내와의 거리도 적당하고,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도 적고, 인구 밀집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확실히 서울보다 덜하죠. 무엇보다 서울과 물리적으로 거리가 생기다 보니 굳이 인사치레로 여기저기 다닐 필요 없이 제 생활에 집중할 수 있게 됐어요. 사월의눈 작업실도 마련할 수 있었고요. 지금 이 작업실은 대구가 저희에게 준 선물이에요. 서울에 있을 땐 방 한편에 책을 다 쌓아두고 작업했죠. 서울은 임대료가 워낙 비싸 이 정도 규모의 작업실은 절대 구하지 못했을 거예요.

전가경 대표와 정재완 디자이너, 부부가 함께 사월의눈을 운영하고 있어요. 두 분이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원래 문학을 전공했는데, 북 디자이너가 되고 싶어서 30대 초반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1세대 북 디자이너인 정병규 선생님이 ‘정병규학교’라는 이름으로 디자인 강의를 하시길래 수강생으로 참여했는데, 그곳에서 같은 수강생인 정재완 씨를 만났죠. 알고 보니 정재완 씨는 이미 정병규 선생님의 애제자로 ‘정병규디자인’에서 디자이너로 근무했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조교가 수강생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 것 같은 느낌이었죠. 저는 이곳에서 디자인의 기본을 다 배울 수 있었어요. 그러다 대학원 석사 논문을 쓰면서 책을 한 권 제작했어요. 그때 정재완 씨와 같이 작업하면서 호흡이 너무 잘 맞는다고 느꼈죠. 연애와 별개로 ‘이 사람이랑 평생 같이 작업하면 정말 행복하겠다’ 싶더라고요.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계속 달려 결국 디자인을 배우게 됐네요.

시간이 좀 걸렸어요. 학부 졸업하고 사범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가 영어교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죠. 그러다 선생님도 내 길이 아니다 싶어서 영자 신문사에 취직했어요. 1년 정도 직장 생활을 하다 지금이 아니면 디자인을 영영 포기해야 할 것 같아 다시 공부를 시작한 거예요. 대학원 졸업 후엔 ‘아지북스’에서 일했어요.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운영하는 출판사로 다양한 기획을 시도하는 곳이었는데, 디자이너가 하는 출판하다 보니 이미지 중심의 스토리텔링을 많이 경험했어요. 일을 할수록 제가 정말 잘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느끼면서 사진책 출판에 대한 욕심을 조금씩 키워갔죠.

사월의눈은 ‘사진-텍스트(글)-디자인’이라는 주제를 중점으로 다루고 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내고 있나요?

‘왜 내가 보는 사진책은 하나같이 사진을 어마어마한 예술 작품 모시듯 대할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어요. 지면이라는 공간은 다양한 표현이 가능한데, 왜 우리는 이렇게 고요한 사진책만 있을까 싶었죠. 사월의눈은 크게 세 갈래 흐름으로 작업해요. 첫째는 ‘사진+α’, 사진과 연결고리가 될 수 있을 만한 다른 장르를 접목해 책으로 발행하는 거예요. 둘째는 디자이너로서 할 수 있는 작업물을 만드는 거죠. 저희의 자부심이기도 해요. 그간 사진책 분야에서는 오로지 사진가만 참여한다거나, 디자이너는 이미지 연출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심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 틈새를 잇는 작업이 공백으로 놓여 있었고, 우리는 양쪽을 다 잡을 수 있으니 사진과 텍스트, 디자인을 연결하는 틈새를 공략하는 거죠. 셋째는 기존의 젊은 작가 또는 우리가 출판을 통해 응원하면서 협업할 수 있는 작가를 만나 책을 만드는 거예요.

두 분 다 디자인을 전공한 만큼 디자인을 중점으로 둔 기획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는 주로 기획과 편집을, 정재완 씨는 디자인을 맡고 있지만 칼로 무 베듯 경계가 명확한 작업이 아니더라고요. 사진책에서는 이미지도, 텍스트도 모두 원고가 되기 때문에 기획‧편집‧디자인 모두 처음부터 같이 구상해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은 작가를 처음부터 섭외해서 함께 책을 구상하는 방식을 시도하고 있어요. 요즘은 프랑스에 살고 계신 엄도현 작가와 올여름 출판을 목표로 ‘호수’라는 주제로 책을 만들고 있고요. 외부의 시선으로 기록할 때, 내부자는 볼 수 없는 새로운 단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엄도현 작가는 호수를 축으로 두 차례에 걸쳐 대구를 기록했어요. 그런 새로운 시선이 필요해요.

2013년 첫 사진책 <사이에서>를 출판하면서 공모전과 수상이 아닌, 사진책이라는 플랫폼으로 사진가 데뷔가 가능한 작가 발굴 프로젝트의 서막을 올렸어요.

평소 사진의 제도권이 너무 강력하고 장벽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사진가로 데뷔하려면 전시를 해야 하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고요. 사진가의 등용문으로 출판이 기능할 수 있다면, 양질의 사진을 찍는 아마추어를 많이 발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이하 <아무도, 다만>)에서는 세월호 참사, <자갈마당>에서는 대구의 성매매 집결지, <Belonging Nowhere>에서는 퀴어 페미니즘을 다루는 등 메시지가 분명한 책도 제작하고 있어요. 시각적 요소만큼 메시지가 강렬하게 와닿더라고요.

주제와 이미지가 명확하다면 사진과 텍스트 사이의 공간을 얼마든지 새롭게 탐색하고 풀어낼 수 있다고 봐요. 우선 <아무도, 다만>은 사월의눈을 통해 꼭 제작하고 싶었던 ‘사진+소설’ 형식이에요.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형태라 더더욱 해보고 싶었죠. 특히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많은 이미지가 있었지만, 주로 다뤄지는 사진이 아닌 다른 방식의 이미지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러다 홍진훤 작가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라는 사진 시리즈를 보게 됐고, 제가 원하는 책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사진의 톤과 어울리는 소설을 찾다가 김연수 작가의 단편소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를 발견했고, 두 분의 동의를 얻어 한 책에 담았어요. 반면 <자갈마당>과 <Belonging Nowhere>는 외부에서 먼저 제안이 들어온 경우죠. <자갈마당>은 대구에서 성매매 집결지 관련 전시를 진행한 최윤정 큐레이터가 제안해 내용을 구성했어요. <Belonging Nowhere>는 저희가 외부 투고를 받지 않는데,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좋은 주제로 투고가 들어와서 예외적으로 응하게 됐고요.

‘사과, 능금의 도시’로 알려진 대구의 모습이 담긴 다양한 이미지를 2022년부터 수집해오고 있는데,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와 현재 진행 상황이 궁금해요. 사과로 대구 이미지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점 자체가 흥미롭더라고요.

‘대구’ 하면 사과가 이미지로 떠올라 막연히 사과 이미지를 수집하고 싶다고 생각만 하던 차였어요. 그러다가 대구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고 계신 이상현 선생님이 SNS에 올린 사과 이미지를 보고 구체적으로 프로젝트 협업을 진행하게 된 거죠. 네덜란드에서 도시 공부를 한 분인데, 대구를 다양한 주제로 매핑하고 계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사과의 도시 이미지 메이킹은 일제강점기가 출발점이더라고요. 대구에 거주하던 일본인이 비옥한 대구 토양에서 사과를 재배하기 시작한 거죠. 한국에서는 역사적으로 그 내용을 크게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덕분에 단순한 사진책이 아닌 이미지 아카이빙이 되어가고 있어요. 1960년대 잡지에 담긴 사과 광고 등 재밌는 이미지가 많아요. 일본인이 구축한 이미지 메이킹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아파트 글자>라는 책은 정재완 디자이너와 함께 직접 사진 촬영도 진행했어요. 대구와 다른 지역에서 발견한 아파트 글자들이 있더라고요.

서울은 새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옛 레터링을 보기 힘들어요. 그런데 대구나 부산, 전주 등 다른 도시에는 아직 옛 아파트가 많이 남아 있어서 레터링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아파트 레터링도 결국 대구 역사와 이어지는 아카이브 형식이 됐어요. 이렇게 적나라하게 아파트 외벽에 이름을 쓰는 건 한국만의 독특한 시각 문화인 만큼 디자이너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죠. 1970~1980년대에 외벽 도장공으로 일하던 분의 얘기를 들어보니, 당시엔 아파트 레터링 작업이 치밀한 설계가 아니라 도장공의 직관적 감각으로 그렸더라고요. 자음, 모음을 쓰는 방식으로 당시 도장공 사이에 유행하던 스타일을 알 수 있었죠. 이 책의 연장선으로 도시 간판 레터링에 대한 수집을 의뢰한 상태예요.

2013년에 사월의눈에서 첫 책을 출간했으니 햇수로 이제 10년을 넘었네요. 10년 동안 스스로 원하는 방향으로 잘 이끌어왔다고 생각하나요?

해마다 두 권씩 출판하는 게 목표였는데, 작년을 제외하곤 목표를 달성했어요. 독자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책을 계속 출판하는데 판매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었을 거예요. 처음엔 순진하게 독립 출판은 판매가 안 돼도 괜찮다고 여겼어요. 그런데 그건 자기 위로일 뿐이더라고요. 다음 책 제작으로 연결되는 디딤돌이 필요해요. 독자의 호응이 있었기에 22권을 만들며 버틸 수 있었죠.

앞으로 다루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요?

하나는 영화와 관련한 책이에요. 시각 문화를 지속적으로 연구하다 보니 영상 문화나 영화 관련 이론서를 종종 읽게 돼요. 영화는 이미지가 몽타주로 조립해 영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스틸 컷처럼 사진으로도 단일한 컷이 존재하잖아요. 영화와 사진 사이의 흥미로운 상호작용을 계속 탐색해보고 싶어요. 얼마 전에 영화 <희수>에서 출발한 책을 한 권 만들었는데, 어떻게 보면 좀 불친절한 책인데도 저희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다 읽어내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더 많은 작업을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고, 앞으로 나아갈 원동력이 됐어요.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리듬 총서’ 시리즈예요.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y Lefebvre가 쓴 각 지역마다 고유한 리듬이 있다는 <리듬 분석Rhythmanalysis>이란 책이 있어요. 일상 문화를 리듬이란 키워드로 들여다본다는 거예요. 대구만의 리듬이 있고, 대구 안에서도 수성구만의 리듬이 있고, 저희가 살고 있는 대봉동만의 리듬도 따로 있다는 거죠. 모든 걸 획일화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종종 ‘한국’, ‘수도권’, ‘대구’ 등 큰 단위로만 평가하잖아요. 각 지역의 다양하고 고유한 리듬을 수집해 지역이 고립되거나 고정돼 있지 않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어요.

Maker's Pi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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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의눈에서 눈여겨볼 사진책 3

홍진훤‧김연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게> 특별판, 2023

사진가 홍진훤과 소설가 김연수가 각자의 시선으로 세월호 참사를 기록했다. 사진과 글, 픽션과 논픽션의 교차로에서 2014년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재현한다. 2017년 발행된 동명의 책의 개정 증보판이다.

감정원, <스틸 컷, 희수>, 2023

대구 염색공단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 노동자에 관한 영화 <희수>. <스틸 컷, 희수>는 감정원 감독의 독립 영화 〈희수〉를 책의 언어로 재해석한 결과물이다. 영화 속 뒤엉킨 시간들은 책 속에서 재정렬된다.

권도연, <북한산>(개정판), 2023

<북한산>은 권도연 작가가 2년여간 북한산에서 찍은 들개 사진 연작을 묶은 사진책이다. ‘뉴타운’ 도시 개발로 인간으로부터 버림받거나 쫓겨난 개들의 사연과 삶을 정교하고도 치밀하게 담아낸 시적 사진 다큐멘터리다.

  • 사월의 눈 전가경
    사라지지 않고, 흐려지지 않는 사진책의 기록
  • EditDanbee Bae, Jihyeon Moon PhotographYeseul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