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플릭 윤동원스트리트 패션 너머의 문화
국내외 패션 브랜드를 다루는 대구 대표 스트리트 패션 편집숍.
일본에서 어묵 제조법을 배운 할아버지께서 봉래시장 입구 판잣집을 빌려 공장을 차리셨다고 해요. 그 공장 안에 있는 집에서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살았어요. 덕분에 어린 시절 기억은 모두 어묵과 관련되어 있죠. 집 안에는 늘 고소한 냄새가 가득했고, 주말이면 공장에서 들려오는 기계 소리에 깨어났고요. 공장에 일손이 모자라면 불려나가 일을 돕곤 했죠. 빨래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하듯 재료 배합부터 포장, 청소까지 일을 가리지 않았어요. 수레나 트럭을 몰고 배달하는 일도 잦았고요. 제대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그렇게 계속 일을 도왔죠.
뉴욕에 있는 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어요. 회계사를 목표로 공부에 몰두하던 중에 아버지 건강이 안 좋아지셨다는 말을 듣고 갑작스럽게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어요. 집에 돌아와서야 회사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았죠. 일을 얼추 마무리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는데, 한 달 넘게 마음이 싱숭생숭하더라고요. 부모님이 오랫동안 일궈오신 공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내가 이 일을 이어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사명감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건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말이죠.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 2011년부터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미국 유학 시절 쌓은 경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어요. 제가 묵었던 집의 주인분이 빵집을 운영했는데, 주말마다 함께 빵을 만들었거든요. 어묵과 빵은 재료를 반죽하고 가공해 판매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많아요. 빵이 훨씬 인기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빵집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떠올렸습니다. 빵집에는 늘 갓 구워낸 빵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고, 그곳에서 내가 먹을 빵을 직접 고르는 게 즐거움 중 하나잖아요. 어묵 베이커리에도 이 방식을 적용해 매장 한편에서 여러 종류의 어묵을 튀기고 진열해 손님들이 직접 쟁반에 담도록 유도했습니다. 어머니께서 30년 넘게 공장을 운영하며 쌓은 노하우가 있기에 가능한 아이디어기도 해요. 그동안 업체의 요구에 따라 어묵 형태나 포장을 다르게 구성해 납품해왔거든요. 손으로 직접 제각각의 어묵 제품을 만드는 일에 이미 익숙했던 거죠.
꾸준히 사랑받는 건 어묵 고로케예요. 어묵 안에 재료를 넣고 감싼 다음 빵가루를 묻혀 튀기는데, 어묵이 특별하고 개성 있는 ‘식품’이라는 인식을 심어준 것 같아 저희도 많은 애착을 갖고 있습니다. 핫바 형태의 어묵에 오징어, 치즈 등의 토핑을 얹은 어메이징바도 인기가 많고요. 사실 인기 제품뿐 아니라 모든 시도가 저희에게는 경험이자 자산이에요. 당시에는 실패했다고 평가받는 프로젝트들이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좋은 성과를 보이는 사례를 수없이 경험했거든요. 제품 개발과 상품 구성에는 특히 어머니께서 많은 역할을 하셨어요.
경영을 하다 보니 회사의 역사를 기록해둔 자료가 거의 없더라고요. 제가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들어온 것들은 기억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막상 기록이 없어 아쉬움이 컸습니다. 제 세대에서 정리하지 않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구나 싶었어요. 저 혼자 ‘아카이빙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이고 처음 공장이 세워지던 때를 기억하는 동네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여쭤보고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10년이 넘었네요. 어묵 베이커리 매장 내부에 있는 벽화 역시 어르신들의 고증을 거쳐 그린 것이에요. 1950년대 어묵을 제조하던 모습을 담았는데, 당시 어시장 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묵을 만들던 절구 색깔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자세로 절구를 밀고 당겼는지 등을 듣고 참조했죠.
기술이 덜 발달하던 시기의 장인 정신에 깊이 탄복했달까요. 특히 원료와 배합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할아버지께서 어묵 공장을 처음 연 당시에는 돌절구를 사용해 생선을 빻고 갈았다고 해요. 지금에 비해 생산성은 굉장히 낮지만, 원료 관점으로만 보면 돌절구로 만든 어묵의 가치가 훨씬 높죠. 생선 살을 기계로 다질 때보다 돌로 찧을 때 식감이 더 좋고 영양이 잘 보존된 어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선은 단백질이기 때문에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데, 돌이 다른 도구에 비해 마찰에 의한 열이 덜 발생하거든요. 이렇게 과거의 제조 방식을 하나하나 돌아보다 보니 어묵의 품질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보이더라고요. 기록을 발판 삼아 어묵 생산 초기의 제조 방식을 복원하는 리뉴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조 공장을 대대적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인데, 원료 세척과 배합 분야 장인을 위한 공간을 따로 두고 젊은 직원들을 교육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기능을 연마해온 분들이 그 기술을 전승할 수 있도록 공간과 도구를 제공하는 게 리뉴얼 프로젝트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고등어조림이나 고등어구이를 잘하는 분들이 생선에 소금을 치는 손맛은 기계가 절대 따라 할 수 없더라고요. 그분들이 생선의 상태를 판단하고 치대는 정도는 오랜 감각으로 체화한 영역이니까요. 내부에서는 ‘영도 삼진’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영도가 저희의 시발점이자 71년 역사를 쌓아온 의미 있는 장소기 때문입니다.
사업 규모가 확대되면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력이나 인프라 부족 문제가 생기니까요. 하지만 부산과 영도는 제가 자란 곳이자 삼진어묵의 시작과 성장을 이룬 곳입니다. 그 때문에 앞으로도 부산에 본거지를 두고 사업을 이어나갈 생각이에요. 항구가 근접하다는 점 역시 저희 산업에서 매력적인 부분이기도 하고요. 작년부터 부산명품수산물협회의 회장직도 맡고 있습니다. 감투를 쓰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부산의 수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강합니다. 제 개인적 바람이 아닌 시대의 변화이자 요구인 것 같아요. 질 좋은 대체 단백질,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수산 단백질이 성장해야 할 단계니까요. 이를 위해 어묵이 대표적 기호식품으로서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제조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 및 해양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부산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일본식 선술집이 많았다고 하죠. 항구도시인 만큼 다양한 일본 문화를 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으니까요. 선술집의 대표 메뉴 중 하나가 어묵이었는데, 선술집 메뉴들이 고급 음식으로 여겨지면서 저렴한 버전의 어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해요. 부산에서 어묵이 크게 부흥한 것은 한국전쟁 시기예요. 피란민들이 부산으로 모이며 식량난을 겪었고,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고래기름에 다진 생선을 튀겨 많은 사람이 먹었던 것이죠. 이후 우동을 파는 포장마차가 늘어나고, 어묵을 우동 고명으로 활용하는 등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부산이 어묵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해외에서 수급한 생선으로 만든 어묵을 우리나라 특산품이라 할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해요. 하지만 어묵은 분명한 부산의 식문화라고 생각합니다. 약 100년 전부터 생선을 가공해 먹는 문화가 바로 부산에서 형성되었으니까요.
어묵이 한국의 길거리 간식이자 전통 식품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저희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평생을 바치셨어요. 저는 당장의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고 세상의 요구와 흐름에 맞춰 식품을 발전시켜나가려 해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긴 호흡으로 조금씩 발전시켜가야 한다는 것을 지난 역사에서 배웠거든요. 저는 어묵 제조 3세대로 어묵 제조에 대한 근본적 맥락을 이해하고 정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렴한 단백질 식품이자 수산물 가공품으로서의 문화를 하나씩 만들고 나면, 이 가능성을 기반으로 다음 세대가 더 의미 있는 일을 해내지 않을까 싶
거든요. 저는 그것이 기업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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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어묵의 스테디셀러 제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