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힙합의 도시입니까 대구 힙합 (1) | 김봉현

한국의 흑인음악을 살피고 기록해온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이 대구로 향했습니다. 레코드와 음악 감상 문화가 일찍이 무르익은 도시 대구에서 그는 누굴 만나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요. 김봉현이 목격한 음악 도시 대구의 르포르타주를 두 편의 연재로 전합니다.

여기가 힙합의 도시입니까 대구 힙합 (1) | 김봉현

여기가 힙합의 도시입니까 대구 힙합 (1) | 김봉현

한국의 흑인음악을 살피고 기록해온 힙합 저널리스트 김봉현이 대구로 향했습니다. 레코드와 음악 감상 문화가 일찍이 무르익은 도시 대구에서 그는 누굴 만나 무엇을 보고 들었을까요. 김봉현이 목격한 음악 도시 대구의 르포르타주를 두 편의 연재로 전합니다.

힙합과 로컬

힙합은 장소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동네를 대표하는 것은 힙합의 오랜 전통이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래퍼들은 무대에서 자신의 출신지를 외친다. 내가 태어난 곳이 어디라고? 내가 어디를 대표한다고? 로커가 관객들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볼 때, 래퍼들은 자신들이 어디 출신인지를 말해준다.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래퍼들은 무대에서

자신의 출신지를 외친다.

한국 힙합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서울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힙합과 함께 가장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지역은 아무래도 대구다. 당신이 동대구역에 도착했다면 한 번쯤 이렇게 중얼거릴 필요가 있다. 여기가 엠씨메타, 이센스, 마이노스, 베이식의 도시입니까.

대구 힙합 페스티벌

나의 경우를 말한다면 힙합과 대구를 연결해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대구 힙합 페스티벌’이다. 대구 힙합 페스티벌은 올해 10월에 개최되어 성황리에 끝났다. 셀 수 없는 힙합/알앤비 아티스트가 이틀 동안 무대에 올랐다. 물론 올해 처음 개최된 건 아니다. 역사가 길다. 뿌리를 찾으려면 무려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대구 힙합 페스티벌의 기획자 여승현 씨가 말한다.

“대구 힙합 페스티벌의 시작은 2013년이에요. 그때는 ‘독도수호 힙합 페스티벌’이었어요. 힙합 공연을 즐기면서 동시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사실을 함께 되새기고 싶었거든요. 그때 관객이 6000명 정도 들어왔는데, 지자체분들이 놀라워하셨어요. ‘우리가 독도 이야기를 하면 청년들이 별 관심이 없는데 힙합 공연을 통해 이야기하니 이렇게 청년들이 많이 모이는구나’ 하고 느끼셨대요. 하지만 돈을 벌진 못했어요. 오히려 3000만 원 정도 적자를 봤죠. 티켓 가격이 1만8000원이었거든요. 그래도 계속 하고 싶었고, 2회 때는 다행히 조금 이익이 났어요. 티켓 가격이 2만7000원이었거든요. 그러다가 2015년에는 페스티벌 이름을 ‘청년 대구로 청춘 힙합 페스티벌’로 바꿨어요. 지방에 사는 젊은 층들이 서울로 빠져나가는 게 사회문제잖아요. 그걸 페스티벌의 정신에 반영한 거죠. 그 후에는 코로나19 때문에 한동안 개최를 못 하다가 올해 다시 열었어요. 생각해보니 이제 따로 의미나 명분은 필요 없겠더라고요. 10년째니까 이제는 ‘대구’와 ‘힙합’만으로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구 힙합 페스티벌이 된 거죠.”

“저희가 올해 멜론티켓 전체에서 2등을 했어요.

1등은 아이유고 2등이 저희예요.”

그렇게 대구 힙합 페스티벌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그리고 가장 큰 힙합 페스티벌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아니, 어쩌면 지금 내가 뱉은 말은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큰 힙합 페스티벌 중 하나’라니. 서울 사람으로서 ‘서울에서 열리는 힙합 페스티벌만큼, 혹은 그에 준하는 페스티벌’이라고 지레 오만하게 뱉은 건 아니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내 예상이 맞았다. “저희가 올해 멜론 티켓 전체에서 2등을 했어요. 1등은 아이유고 2등이 저희예요. 서울이든 아니든 지역을 떠나 데이터와 팩트로 말하면 한국의 힙합 페스티벌 중에서 저희가 1등이에요.”

래퍼들의 이유 있는 리스펙트

내가 대구 힙합 페스티벌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로 래퍼들의 ‘리스펙트’ 때문이다.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꾸준히 봐온 것 같다. 대구 힙합 페스티벌을 향한 래퍼들의 애정과 존중을. 그게 이상하게 기억에 남았다. 여승현 기획자가 말한다. “저희 페스티벌에 관객으로 와서 래퍼가 된 사람이 많아요. 일단 우원재 씨가 2015년도에 저희가 주최한 대구힙합경연대회 우승자 출신이에요.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원재 씨가 무대에서 그 얘기를 관객에게 하더라고요. 정말 뿌듯했죠. 로꼬 역시 본인이 힘든 시절에 우리 페스티벌에서 불러준 걸 잊을 수 없다고 말했어요. <고등래퍼>에 출연하고 하이라이트 레코즈에 입단한 조원우도 처음에는 관객이었다가 래퍼가 된 경우예요.”

그가 계속 말을 이었다. “올해 다시 페스티벌을 열게 된 것도 관객들의 마음 덕분이에요. 제가 올해 초 페이스북에 페스티벌 개최 관련해 설문조사를 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의 답이 너무 감동이었어요. 그동안 우리 페스티벌에 계속 왔는데 이제 아이 엄마가 됐다는 분, 자신이 참여한 첫 페스티벌이 ‘독도수호 힙합 페스티벌’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다는 분, 대구 지역에서 계속 개최하는 페스티벌이기에 자랑스럽다는 분 등 정말 많은 분이 따뜻한 답을 해주셨거든요.”

“저는 대구 힙합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가 대구에서 태어난 것은 알겠다. 하지만 그는 왜 다른 많은 청년처럼 서울에서 살아가지 않는 걸까. 당연히 그게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마음은 무엇일까. 그러자 여승현 기획자는 마치 준비한 듯 정돈된 답변을 들려주었다. “지방 사람은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아요. 대구 힙합 페스티벌도 지방에는 제대로 된 페스티벌이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했어요. 실제로 저희 페스티벌 관람객 중 대구·경북 지역 사람들이 절반이나 되거든요. 저는 대구 힙합에 이바지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바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 힙합 전체로 본다면 아마 1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대구에서 계속 페스티벌을 열고 싶어요. 관객이 예순 살이 되어도 오고 싶은 페스티벌을 만들고 싶고, 대구에서 힙합을 느끼고 싶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로컬에서 역사를 쌓아가려고 해요. 앞으로도요.”

Illustration | 대구의 랜드마크 앞에 선, 끝없이 펼쳐진 리스너와 뮤지션의 교감. 대구 힙합 페스티벌의 실황 사진을 모델로 작화했다.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봉현

힙합으로 일 벌이는 사람. 2003년부터 음악에 관해 국내외에 글을 써 온 힙합 저널리스트이자 영화제를 열고 앨범을 만드는 기획자이다. 화제의 한국관광공사 힙합 영상을 기획하거나 김경주 시인, MC메타와 시와 랩을 연결하는 프로젝트 ‘포에틱 저스티스’를 진행하는 한편 카카오프렌즈 플레이리스트의 곡을 고르며 매일을 쌓아나간다. 대표 저서로 <한국힙합, 열정의 발자취>, <힙합: 블랙은 어떻게 세계를 점령했는가>, <한국힙합 에볼루션> 등이 있다.

  • 여기가 힙합의 도시입니까
    대구 힙합 (1) | 김봉현
  • EditMijin Yoo IllustrationAnuj Shrest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