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국물의 본향 대구 밥상 (3) | 박정배

탄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구성진 음식 이야기로 오랜 시간 독자와 만나온 칼럼니스트 박정배가 대구를 찾았습니다. 치킨과 분식, 붉은 국물과 내장까지 네 편의 연재로 대구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봅니다. 잠시 숨을 고르세요. 읽는 것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지 모르니까요.

붉은 국물의 본향 대구 밥상 (3) | 박정배

붉은 국물의 본향 대구 밥상 (3) | 박정배

탄탄한 사료를 기반으로 한 구성진 음식 이야기로 오랜 시간 독자와 만나온 칼럼니스트 박정배가 대구를 찾았습니다. 치킨과 분식, 붉은 국물과 내장까지 네 편의 연재로 대구 사람들의 밥상을 들여다봅니다. 잠시 숨을 고르세요. 읽는 것만으로도 얼큰하게 취할지 모르니까요.

“육개장은 대구의 음식이다. 육개장은 ‘대구탕반’으로도 불렀다. ‘대구탕반’의 본명이 육개장이다. 대체로 개고기를 한 별미로 보신지재補身之材로 좋아하는 것이 일부 조선 사람들의 통성이지만, 특히 남도 지방 시골에서는 ‘사돈 양반이 오시면 개를 잡는다’라고 개장이 여간 큰 대접이 아니다. 이 개장은 기호성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의 사정까지 살피고 또는 요사이 점점 개가 귀해지는 기미를 엿보아서 생겨난 것이 곧 육개장이니 간단하게 말하자면 쇠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인데, 시방은 큰 발전을 하여 본토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하였다.”(1929년 12월 1일 자 <별건곤>)

대구의 음식은 강하고 세다.

붉은 국물은 대구 음식의 원자로 핵처럼

강력하고 상징적인 기표다.

19~20세기 초의 장터국밥집.

설렁탕의 서울, 탕반*의 대구

“탕반 하면 대구가 따라붙는 것처럼 설넝탕 하면 서울(경성)이 따라붙는다”(1926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라고 할 정도로 탕반은 대구를 대표하는 음식이다. 대구의 음식은 강하고 세다. 붉은 국물은 대구 음식의 원자로 핵처럼 강력하고 상징적인 기표다. 육개장은 개장狗醬에 육肉, 쇠고기이 붙어 생긴 말이다. 닭을 넣으면 ‘닭개장’ 혹은 ‘계장국’, 스님들은 채소를 넣은 ‘채개장’을 먹는다. 개장을 먹기 싫어 한 양반들이 여름 보신탕의 대명사로 개장 대신 육개장을 먹으면서 생긴 문화다.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이 발달한 이유는 조선 후기 들어 백 개가 넘는 얼음 빙고인 사빙고私氷庫가 한강 변에 들어서면서 쇠고기의 공급과 수요가 폭증했고, 개고기에서 쇠고기를 먹는 문화가 양반 사이에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개고기 기피 현상에서 영향을 받아 조선의 개장국 문화가 변화한 탓도 있다.

* 국에 밥을 만 음식.

대구의 탕반을 언급한 1926년 8월 11일 자 <동아일보> 기사 갈무리.

개장에서 육개장으로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1946)에서 육개장을 “개고기가 맞지 않는 사람을 위해 쇠고기로 개장국 비슷하게 끓인 것”이라 소개하고 있다. 육개장은 개장국의 숨기고 싶은 과거를 지닌 것이다. 개장국은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1670년경)에 ‘개장국느르미’로 처음 등장한 이후 ‘구육갱’(<경도잡지>,19세기 초), ‘개장’(<규합총서>, 1809) 등으로 거듭 언급된다. 개장국에 쇠고기를 넣은 최초의 육개장에 대한 기록은 연세대학교 소장 <규곤요람>(1896년경)에 처음 나온 이후 조리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메뉴가 된다. 개장국의 변형인 육개장은 개장국이 그러하듯 여름 복중에 먹는 복 달임 음식이었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여름철에 단백질은 더위를 견디게 해주는 핵심 영양소다. 서민들은 개고기‧닭고기나 생선으로 몸보신을 했고, 양반들은 쇠고기나 민어 같은 고급 생선을 먹었다. 


“영남 지방에서는 삼복 중에 개죽음이 굉장하다. 하지만 안주(황해도)의 명물로 삼복 중의 닭 천렵이 대단하다”(1929년 8월 1일 자 <별건곤>)란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복날이면 북쪽에서는 닭을, 남도에서는 개를 주로 먹었다. 1933년에 미국에서 발간된 <Oriental Culinary Art동양요리법>에는 육개장이 ‘SUMMER SOUP여름 수프’로 소개돼 있는데, 육개장이 여름 보양식임을 알 수 있다. 1939년 7월 8일 자 <동아일보>에서는 “고기는 삶은 후, 반드시 손으로 찢고 양(내장)은 칼로 썬다. 대파를 많이 사용한다. 고기와 고춧가루, 고추장으로 양념한 채소를 버무려 다시 한소끔 끓여서 낸다. 한 번 삶아낸 밀국수를 넣어서 먹으면 맛이 희한하다”라고 밝히고 있다. 육개장의 고기도 개장국의 그것처럼 결대로 찢어 먹었다는 대목이 재미있다. 한편 대파는 지금도 대구식 육개장이나 따로국밥의 핵심 식재료다.

‘경상도식 육개장’은 선지가 없고

사골 국물 대신 양지머리만으로 육수를 만든 것이다.

우거지가 주축이 되면 ‘해장국 스타일의 육개장’,
선지가 들어가면 ‘대구식 따로국밥’
이 된다.

육개장의 본향, 대구

육개장이 대구의 음식인 것은 1920년대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구 탕반은 본명이 육개장인데 남도에서 즐겨 먹던 개장과 개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쇠고기로 개장처럼 만든 것으로, 지금은 대발전을 하야 본토本土인 대구에서 서울까지 진출을 하였다.”(1929년 12월 1일 자 <별건곤>) 대구의 육개장은 경상도 전역에서 먹는 소고기국밥과 된장으로 국물을 만 장국밥을 두 축으로 개장국이 결합돼 만들어진 외식 문화다. 대구는 1601년에 경상감영이 세워진 이후 경상도 물산의 중심지였다. 외식이 발달할 조건을 갖추고 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품은 오늘의 경상도 육개장은 <영남일보>의 이춘호 기자에 따르면 세 가지로 구분된다. ‘경상도식 육개장’은 선지가 없고 사골 국물 대신 양지머리만으로 육수를 만든 것이다. 우거지가 주축이 되면 ‘해장국 스타일의 육개장’, 선지가 들어가면 ‘대구식 따로국밥’이 된다.

대구의 육개장집 – 청도관, 옛집,양정화네 앞산온천골, 성암골가마솥국밥

일제강점기에 문을 연 ‘청도관’은 전통 대구식 육개장을 팔았고, ‘청도집’은 선지우거지해장국 스타일로 영업을 했지만 지금은 문을 닫았다. 1946년에 오픈해 여전히 영업 중인 ‘국일 따로국밥’은 대구식 따로국밥의 역사 그 자체다. 육개장은 1950년대 이후 따로국밥으로도 분화, 발전했다. 국일 따로국밥은 원래 주변의 나무꾼이나 유흥가 사람들에게 국밥을 팔았다. 하지만 한국전쟁 통에 서울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대구의 육개장은 따로국밥으로 변화했다. 밥을 말아 먹지 않는 양반이나 상류층, 특히 여성들이 국과 밥을 따로 주문하면서 생긴 음식 문화다. 이렇게 시작된 따로국밥은 현재 대구 육개장의 주류가 되었다. 1993년에는 대구시에서도 따로국밥 브랜드를 만들기 시작해 ‘국일 따로국밥’, ‘벙글벙글식당’ 등이 대표 따로국밥집으로 지정되었다.

한국전쟁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국일 따로국밥.

1948년에 영업을 시작한 ‘옛집’은 대구식 육개장을 대표하는 식당이다. 사골로 국물을 내고 개고기와 비슷한 식감과 형태를 지닌 사태 살을 넣는다. 국물은 맑지만 기름지다. 간은 소금이나 조선간장으로 내는데, 간장이 감칠맛을 풍성하게 한다. 고춧가루와 더불어 기름에 녹인 고추기름을 얹은 국물과 대파와 사골 국물을 섞어 낸다. 대파는 껍질을 몇 꺼풀 벗겨 흙냄새가 나지 않게 하고, 80% 정도 끓인 뒤 찬물에 식혀 하얀 대 부분의 단맛을 천천히 우려내는 게 핵심이다. 국은 단맛이 은은히 길게 남는다.

옛집의 상차림.

대구 앞산에 있는 ‘양정화네 앞산온천골’의 육개장도 고급스러운 맛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대구와 한 몸처럼 붙어 있는 경산의 ‘성암골 가마솥국밥’은 가정에서 먹던 소고기국밥 스타일의 한우국밥을 파는데, 무와 대파에서 나오는 채소 특유의 단맛에 고추기름의 매운맛과 기름 향이 소금 된장의 염도와 밀착돼 강렬한 타격감을 준다.

대구 육개장 맛의 비밀, 대파

대구 육개장이나 소고기국밥에서 주연급 조연으로 대파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식에서 고사리가 대세를 이루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여담이지만 고사리가 들어간 육개장이 장례식장에 나오는 것은 고사리가 망자의 노잣돈을 묶는 줄의 역할을 한다는 민간신앙에 기인한 것이다.

대구 지역 대파의 중심에는 고령 다산면 호촌리 사문진나루터 언저리 강변의 사질토 파밭에서 나는, 흰 대가 긴 일명 ‘다끼파’가 있었다. 사문진나루터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 사람들이 먹는 대부분의 파를 공급했던 다끼파의 주산지였다. 그러나 외식 산업이 다양한 형태로 성장하면서 1970년대 들어 대구 육개장 수요도 위축됐고 다끼파도 그만큼 설 자리가 줄어들었다. 특히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하고 전국 각처에서 재배한 파들이 대구 서문시장, 원대시장 등으로 내려오면서 다끼파는 전설로 남는다. 현재는 부산시 강서구 녹산동·명지동, 사하구 하단동, 김해시 장유동, 제주도 등지가 대구 파의 주 공급처가 되었다.

서울이 설렁탕‧곰탕같이

달을 닮은 하얀 국물의 중심지라면,

대구는 태양의 흔적을 지닌 붉은 국물의 본향이다.

대구의 육개장은 붉은색을 띠고 있지만 맵다기보다는 달달하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대구 사람들은 이 붉은 국물로 하루를 열고 닫는다. 경상도의 소고깃국 문화와 개장국, 장터국밥 문화가 고스란히 붉은 육개장 안에 담겨 있다. 서울이 설렁탕‧곰탕같이 달을 닮은 하얀 국물의 중심지라면, 대구는 태양의 흔적을 지닌 붉은 국물의 본향이다.

Illustration | 박정배 작가가 옛집, 벙글벙글식당, 성암골 가마솥국밥, 국일 따로국밥을 오가며 보내온 밥상 사진을 종합한 대구의 붉은 한 상 풍경.

**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외부 기고문은 지역의 문화와 산업을 다각도로 이해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에디토리얼 디파트먼트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정배

한·중·일 음식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고 현장을 탐사한다. 글 전체에 거세게 몰아치는 사료는 읽는 이를 식문화사의 생생한 한가운데로 옮겨놓는다. <조선일보>에 ‘박정배의 한식의 탄생’, ‘결정적 메뉴’ 등을 연재했으며, 넷플릭스 <한우랩소디> 같은 방송 프로그램에 자문 역할을 하거나 직접 출연하곤 한다. ‘국물아카데미’, ‘국수학교’ 등 음식 관련 강의 아카데미도 운영 중이다. 저서로 <만두, 한중일 만두와 교자의 문화사>와 <음식강산> 등이 있다.

  • 붉은 국물의 본향
    대구 밥상 (3) | 박정배
  • EditMijin Yoo PhotographJeongbae Park IllustrationThibaud Here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