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끝에서 응시와 사유 (3) | 이민경

오랜 에디터 생활을 하다 보니 어느새 나는 남들 다 가는 휴가 시즌을 한참 비껴간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소란스러운 북적임과 무국적의 요란한 에너지로 꽉 찬 휴가 시즌보다는, 한적한 비수기 시즌에만 맛볼 수 있는 관광지의 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평온하고 한적한 일상이 오롯이 그 자리를 메울 때, 그곳은 관광지로 포장되느라 가려진 자신의 진짜 맨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도.

그리하여 9월의 시작, 가을의 문턱에서 찾은 곳은 대구 달성 하빈면의 ‘하목정’이다. 이곳은 사실 7~8월이 성수기라고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여름내 100일 동안 피어 있는 배롱나무가 지천에 붉은 아름다움을 뽐내기 때문이다. 서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서쪽으로 한참을 내달리다 도착한 동네, 하목정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조금 독특했다. 장엇집과 낡은 모텔, 정리되지 않은 듯한 도로 안쪽 끝에 있는 듯 없는 듯 숨어 있는 느낌이었달까. 마치 찾아올 사람만 알아서 찾아오라는 듯.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던 낙포 이종문이 선조 37년에 세운 것으로, 원래는 주택의 사랑채였으나 안채가 없어지고 현재는 정자만 남아 있다. 조선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이곳에 머문 적이 있어 하목정이라는 이름을 이종문의 장남인 이지영에게 직접 써주었다(현재는 보물 제205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이름은 당나라 시인 왕발의 시 ‘등왕각서’에서 따왔는데, 시의 내용을 잠시 읊어보면 이토록 서정적인 장면이 또 없다. “지는 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가지런히 날아가고/ 가을 물은 먼 하늘색과 한 빛이네.” 사주문을 열고 들어가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낙동강과 함께 푸른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과연 이름과 참 잘 어울리는 풍광이다.

달성 하목정

임진왜란 때 의병장 낙포 이종문이 선조 37년(1604)에 세운 정자. 조선 중 후기 별당건축의 좋은 예시로, 현재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하산리

가장 기대했던 정자는 오랜 세월 햇빛과 공기, 비바람에 의해 낡고 바랜 모습이었지만 그래서 더욱 운치가 있었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시원하게 뚫린 대청마루. 지나온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보여주듯 바닥에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반질반질한 윤이 났다. 오히려 구석구석 공들여 관리한 느낌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뜨거운 여름의 절정을 보내고 이제 막 지기 시작한 배롱나무가 보여주는 대청마루의 차경이 어쩐지 더 아련하고 애틋해 보였다.

과거의 유적지를 찾을 때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시대를 산 선인들의 삶을 상상하곤 한다. 그들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면 어느새 입가에 웃음이 번지는 순간이 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쓰고 먹고 생활하는 모습은 달라졌을지언정 ‘사람 사는 것은 다 매한가지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서다. 사람들과의 관계나 일터에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설렘, 좌절, 노여움, 회한,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작은 기대와 희망들···. 결국 과거에도 지금도 삶의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내 인생의 무게가 덩달아 아주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그때도 지금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은 없다. 우리가 과거 선조들의 공간에 있을 때 이유 없이 편안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까닭은 혹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반영된 것은 아닐는지. 어느덧 발걸음에 가벼운 공기가 스며들어, 이끌리듯 근처 ‘묘골 마을’로 향한다. 과거의 시간 어딘가, 연유를 알 수 없이 그리운 공간에 기대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속에 솔솔 불어온다.

계절의 끝, 배롱나무의 분홍빛이 아스라한 터널을 만들어내며 마을 입구까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560년의 역사를 고요히 품어온 마을. 삼촌에게 왕권을 빼앗긴 어린 왕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숨진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살고 있는 집성촌이다. 박팽년과 성삼문, 이개, 유성원, 하위지, 유응부 등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 ‘육신사’가 자리한 곳이기도 하다. 이 마을에는 원래 수백 채의 한옥이 있었는데, 전쟁 등으로 일부는 훼손되었고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후 한옥 몇 채가 재건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맨 먼저 들른 곳은 묘골 마을의 사랑채로,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환대하는 카페 ‘묘운’이다. 실제로 이곳은 박팽년의 직계 후손들이 마을에 놀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고 싶어서 지은 한옥이다. 오후의 카페에는 손님들이 꽤 있었음에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한식 명인과 차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구성한 정겨운 디저트 메뉴가 눈길을 끈다. 우리 일행은 곶감 단지와 커피를 즐기며 공간을 향유했다. 쉽사리 보기 힘든 거대한 대들보가 범상치 않아 찾아보니, 건축양식이나 구조 모두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한 통창이 배롱나무의 끝자락을 느슨하게 붙잡고 있다. ‘일편단심’, ‘청렴결백’을 상징한다고 하여 사원이나 선비의 정원에 주로 심었다는 꽃. 무더위를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눈부셨던 건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묘운

묘골마을의 사랑채 역할을 하는 카페. 한식 명인과 차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구성한 곱고 다정한 디저트 메뉴가 손님을 반긴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34
@myoun_cafe

카페의 가구, 식기, 오브제는 모두 여러 공예 작가와 협업해 제작한 것으로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물론 세심한 디테일 하나하나 아름다웠지만, 사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전체 공간 구성이나 가구를 놓는 방식, 강약을 조절하는 디자인이 현대 작품을 보듯 유연하면서도 입체적이었다는 점이었다. 곳곳에는 집안 대대로 전해진 고서와 소품이 놓여 있었는데, 그 모습이 세련되면서도 단아한 품위를 자아냈다. 어느 것 하나 진부하거나 억지스럽지 않은, 있어야 할 것들이 제자리에 자리한 느낌이랄까. 문득 카페의 이름을 입안에 머금어본다. ‘묘운’. ‘묘골 마을의 구름 밑에서 쉬다 가라’는 뜻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유유히 흐르는 구름 같은 시간을 보내며 생각했다. 그것은 전통문화의 가치와 진리를 탐구하고 복원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현대에 전할 방법을 모색하는 순간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일종의 소리 없는 대화dialogue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과거를 넘어 현재의 공간으로 흐르는 시간은 오묘했고, 그 시간의 공간은 절묘했다.

풍류가 느껴지던 ‘충효당’‘명경지담’ 연못을 지나 육신사까지 걸어가며 동네를 한 바퀴 산책했다. 특히 정조 2년에 대사성을 지낸 서정공, 박문현이 지은 곳이자 19세기 중엽부터 도곡공 박종우(문장으로 이름이 높은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병자호란 때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평생 지은 글을 모두 태운 채 은거한 인물)의 재실로 사용한 ‘도곡재’는 조선 시대 남부 지방 양반 가옥의 전형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어 내부를 다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초가와 한옥이 어우러진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연실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고택 앞에 이름 모를 꽃들이 싱싱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이는 다시 말하면 지금도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뜻. 선조들의 터를 소중히 하면서 그 위에 자신들의 현재를 정성스레 가꾸며 사는 후손들의 마음이 내 안에도 천천히 번져갔다.

묘골마을

대구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 있는 순천 박씨 집성촌이다.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취금헌 박팽년의 후손들이 약 560년간 대를 이어 살아온 영남의 대표적 양반 마을이다.
 
대구 달성군 하빈면 육신사길 39-4

느린 시간의 궤적이 기와와 담장, 툇마루 마디마디 내려앉아 있는 묘골 마을, 그리고 하목정···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이곳을 단지 대구의 배롱나무 명소가 아니라, 한옥 그 너머의 삶을 반추할 수 있는 우리의 소중한 유산으로 기억해주었으면 한다는 것. 물론 방문하기에는 배롱나무가 마을 전체를 물들이는 여름 한낮이 가장 좋은 시즌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는 꽃의 아스라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성수기와 달리 한적한 비수기에만 느낄 수 있는 공간의 아름다움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고 바라보는 마음에서 삶의 여백과 사색을 발견할 수도 있음을 지금 여기, 우리 주변 곳곳이 넌지시 말해주고 있다.

이번 대구행에서 지낸 숙소는 앞의 풍경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동대구역에서 약 40분을 달려 도착한 청도의 ‘이서 스테이’. 이곳은 한국건축문화대상과 대구시 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마트 건축사무소의 작품으로, 가족이 머물 별장을 짓는 마음으로 약 2년여에 걸쳐 완성했다. 무엇보다 푸른 전원의 차경을 그대로 담은 시원한 개방감이 인상적이었는데, 평소 빛과 그림자, 선을 중시하는 건축가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오직 풍경과 쉼을 위한 집이기를 바라던 건축주의 바람은 집 안 곳곳의 섬세한 디테일로 표현되었다. 특히 TV 대신 오디오에 자리를 내준 거실은 일일이 결을 맞춘 참나무 소재의 조형적 천장으로 인해 사운드의 울림과 퀄리티가 확실히 달랐다. 말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선과 면의 미감이 아름다웠던 방과 욕실, 구조적 계단이 이끄는 2층 공간의 드라마틱한 시퀀스도 좋았지만,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순간 쏟아지던 햇살과 눈앞에 펼쳐진 짙푸른 초록의 풍광이 기억에 남는다.

이서

건축주 권정화 대표가 가족이 머물 별장을 짓는 마음으로 완성한 공간으로, 대구시 건축상을 수상한 바 있는 스마트 건축사무소가 설계를 담당했다. 완벽한 쉼을 위한 집이었으면 하는 대표의 섬세한 바람을 공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경북 청도군 칠곡리 193-1
@ether.stay

결국 모든 것의 완성은 자연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부엌과 테이블에는 이서의 브랜드 스토리와 함께 로컬 크리에이터가 만든 화과자와 차, 커피가 준비되어 있었다. 탁 트인 높은 하늘을 마주하며 고요한 시간을 만끽하길 바란다는 이곳만의 환대다. 창밖의 능선과 그 아래 퍼즐 같은 마을을 천천히 맞춰보는 여행.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일상 속 쉼표였다.

이민경

잡지 <스타일 H>, <인스타일Instyle> 패션 에디터, 현대카드에서 콘텐츠 마케팅 관련 일을 했다. 오랜 기간 잡지사 에디터로 일하며 차곡차곡 쌓아온 감각으로 도쿄라는 도시를 하나의 브랜드로 비춰 다층적 시선으로 풀어낸 책 <도쿄 큐레이션>을 썼다. 500페이지가량의 두꺼운 책에는 6년간 도쿄에 머물며 도시를 관찰한 깊이 있는 풍경이 담겨 있다. “들어가 봐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다”는 책의 첫 문장처럼, 작가는 실제로 오랜 취재를 통해 자신이 마주하고 경험한 순간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내며, 일상 속 크고 작은 영감을 통해 삶의 태도를 탐구한다.